마지막 등급 산출 과목을 망치고
3학년 1학기 기말고사의 시작
사실상의 파이널 내신
그리고 그 첫날 시험 과목 중, 유일하게 등급을 산정하는 과목, 언어와 매체
사실상의 파이널 과목.
그 파이널 내신의, 파이널 시험 과목을 망쳤다.
아들의 시험 결과를 듣고
너무 속상해서, 맥주 2캔을 들이붓고 침대에 누웠다.
마침 건조기에서 빨래가 다 말랐다는 신호음이 울려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다 마른 빨래를 거실에 던져 놓은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 누워있었다.
얼마전 유튜브에서 보니 정재승 박사가 말하기를
"어른이 된다는 건 본인이 도저히 통제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때, 그것이 세상사이든 자식일이든
무기력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른이 언제 된다는 말인가?
오늘도, 내일도, 금요일까지 쭉 기말고사이다.
하지만 진로선택과목.
앞으로의 시험과목은 내신 성적 산출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얘기.
언어와 매체를 선택하게 한 내가 너무 미웠다.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언어와매체에서 화법과 작문으로 갈아타고 있을때,
세상만사 내 일이 아닌듯 초연하게, 하루 하루 주어진 일을 그저 도장 깨듯 클리어하고 안심하는 아이의 작태가 한심스러웠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2학년까지는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을 올리는데 신경쓰자. 입시전략을 구상하는건 3학년 올라가서도 충분하다. 우선 실력부터 키우자. 그래서 실제로 나는 아이의 입시 전략은 딱 3월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올해 조금 다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수능에서, 수능 최저에서 문/이과의 구분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화법/언어, 확률/미적, 사탐/과탐의 구분을 거의 모든 대학에서 없애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학교내 선택과목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 언어와 매체 과목의 신청자 수가 전년도에 비해 급감한 것이다. 그런데....나는 이러한 현상을 놓치고 있었다. 고민하지 않고 있었다. 이과는 언어와 매체지, 공대는 미적분이지, 자연계는 과탐이지...이러한 나의 고지식함을 아들에게 전수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성향과 능력을 오해하고 있었다.
아이는 내용이 쉬워 접근성이 좋지만, 지문이 길고 자질구레하게 문제를 꼬아서 내는 화법과 작문보다는 문법위주라 공부량과 암기 분량이 많지만, 비교적 화법과작문보다는 문제유형이 확실한 언어와 매체와 성향이 더 잘 맞을거란 착각. 아니었다. 이 아이는 다른 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쉬운 과목을 더 쉽게 잘하는 아이였다. 어려운 과목에서 어려운 문제가 나와도 흔들리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는 그런 류의 아이가 아니었다.
과탐을 오랫동안 준비해 왔으니, 과탐에서 어느정도 실력을 발휘해줄 거란 기대도 마찬가지.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가 있다. 너무나 쉽게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이다. 교사 집단은 유난히 더 그렇다. 반짝거리는 눈빛과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수업에 집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대하는 학생들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교무실에서 우리들끼리 '000이는 너무 괜찮지 않아? 사회에 나가서도 인정받고 성공할 아이야...호호호'하는 대화를 자주 나누곤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학교에서 제법 훌륭했던 아이가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몇년전부터 수업 태도와 시험 성적의 인과관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정체는 1학기 중간고사 이후가 되어서야 서서히 드러나곤 했다. 수업태도가 너무 훌륭했던 아이가 5~6등급의 성적을 받고, 수업 시간에 매번 졸거나 눈에 띄지 않던 친구들이 1등급의 성적을 받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학교에서는 생기부에 들어갈 세특을 챙겼다.
성적이 안좋은 학생들도 학원을 다니고, 성적을 올리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생기부에 들어갈 세특을 챙겼다.
입시에서 권선징악이 존재하지는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정부나 교육부의 방침에 따라 이리저리 표류하는 입시판에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매번 흔들리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을 뿐이다.
고려대 입시설명회때 만난 입시사정관에게 물었다.
'왜 고려대같은 학교가 사탐/과탐 구분을 없앴씁니까?'
'글쎄요...교육부의 방침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나 역시 추측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이과의 문과 침공이라는 사태가 있었다. 표준점수가 높은 어려운 과목(언매/미적분/과탐)을 선택한 이과 학생들이 학교 레벨을 높여 문과 학과에 입학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입학한 이과 학생들은 오히려 문과 학과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다시 재수를 해서 대학의 이탈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아마도 사탐/과탐 구분을 없앴을것이다. 문과/이과 선택과목을 없애면 이과의 문과 침공이라는 말도 없어질것 아닌가~
그러니 너도나도, 특히 재수생들은 모두 미적분에서 확통으로, 과탐에서 사탐으로 갈아탔다. 공부량이 3배에 달한다는 물리나 화학을 공부하느니, 사회와문화 생활과윤리를 공부하고 1등급을 받겠다는 심산이다. 작년에는 의대 정원으로 입시판을 흔들어놓더니, 올해는 사탐런으로 입시판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발맞추지 못한 2인이 있다.
나와 아들.
인정해야겠다.
어쩌면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아이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내가 바라는 대학보다 수시의 라인을 더 낮춰야할지도 모르겠다.
실연의 고통처럼 참으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