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비밀이 밝혀졌다.
K86-3104
남편의 케이스 넘버이다. 입양서류에 들어가는 아이의 사진에는 이름 대신 번호가 적혀있다. 대구에서 신원미상의 미아로 발견된 남편은 미국으로 입양 가기 전까지 K86-3104번의 사내아이일 뿐이었다.
표상석
남편이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될 때 입양서류에 적혀있었던 이름이다. 보육원에서 지어준 이름이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누가 어떤 경로에서 그 이름을 지어준 것인지, 입양서류에는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도 양부모님도 '표상석'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출처를 모른 채 지금껏 살아왔다. 입양 간 후로 한 번도 불려보지 못했던 이름. 남편에게 '표상석'이라는 이름에 별 애정도 의미도 두지 않았다. 성을 제외한 '상석'이란 이름을 'SangSuk'으로 표기해 미들네임으로 양부모님이 남겨주셨지만 '상석'과 'SangSuk'은 별개의 이름이었다. 'SangSuk'은 '쌩쑥'이지 '상석'이 아니었다.
남편을 입양하기로 결정한 뒤, 양부모님인 메리와 조는 아이에게 퍼스트 네임으로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인의 뿌리를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어 '상석'이란 한국 이름을 퍼스트 네임으로 그대로 쓰고 싶기도 했지만, 미국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것을 고려했을 때 미국식 이름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한국 이름으로는 또래 친구들이 아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못할 것 이기 때문이다. 메리와 조는 많은 고민 끝에 미국식 이름으로 퍼스트 네임을 붙이자는 것에 최종 결론을 내었다.
그리고 '상석'은 'SangSuk'을 미들네임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퍼스트 네임으로는 조의 이름에서 따온 'Joe'와 오랜 친구의 아들 이름인 'Nathan'을 더해 'Jonathan'이라고 지어주기로 했다. 아이가 집에 온 첫날부터 메리와 조는 아이를 'Jonathan'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새 이름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모두들 곧 적응해 갔다.
조나단 쌩쑥 드부아
남편은 주로 ‘Jonathan’을 줄인 애칭인 'Jon(존)'으로 불렸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Jon'으로 불렀다. 좋은 의미에서 양부모님이 붙여주신 이름이지만, ‘Sang Suk'이란 미들네임은 남편에게 매우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다. 모든 것에 민감해지는 사춘기가 되니, 남편은 자신의 미들 이름이 더 싫어졌다. 친구들이 'Jon'이 아닌 'SangSuk'으로 가끔 부를 때가 있었다. '야, 이상한 이름 갖고 있는 너!!'라고 짓궂은 장난을 칠 때, 남편을 "Sang Sooook!(쌩-쑤-욱!)"으로 부르곤 했다.
"존이 이 일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한 사건이 있었지."
남편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남편의 이모님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존이 학교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존이 뭔가 달갑지 않은 행동을 했나 봐. 존을 멈추려 했던 선생님이 모두의 앞에서 크게 외쳤어. ' 존, 너무 당장 그만 안 두면, 앞으로 너를 미들 이름으로 부를 거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 존이 자신의 미들 이름을 부끄러워할 거라고 맘대로 생각한 거잖아. "
오랜 시간 남편에게 한국식 미들네임은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헷갈리는 하는 존재였다. 굳이 가지고 있음으로써 도움이 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부각하기만 하는 거머리 같은 존재였다. 남편은 어린 시절 'Jon'이 아닌 'Sang Suk'로 불릴 때마다 긴장을 바짝 차려야 했다.
한국에 와서도 남편은 자신을 한 번도 '표상석'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에겐 한국씩 발음으로 자신을 '조나단'이라고 소개했고, 외국인들에겐 'Jon'이라고 늘 소개했다. 의미도 없는 누군가가 강제적으로 붙여준 한국 이름 세 글자 때문에 한국에서 행정업무를 처리할 때 매번 꼬여 진절머리가 난다고. 영어 이름만 남기고 한글 이름은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표상석'이라는 세 글자는 그냥 없애도 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남편이 마흔을 바라보기 시작한 지금에야 놀라운 이름의 비밀을 밝혀내었다. 대구 파티마 병원 대합실에서 미아로 발견된 남편을 보육원에 데려다준 신암4동 파출소의 경찰관 이름이 바로 '표상석' 이였다는 것이다.
이름의 비밀을 알게 되자, 남편에게 한글 이름은 순식간에 의미 없던 것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남편이 한 때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누군가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떼어버리고 싶던 이름에서 이젠 자신의 과거를 증명해주는 중요한 이름 석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린 아직 대구에 있을지 모르는 '표상석'씨를 찾아보기로 했다. 만약 85년도에 20-30대 젊은 경찰관이었다면 지금쯤이면 정년퇴직을 하고 건강하게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 '표 씨'라는 흔한 성이 아니다 보니 대구에 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남편이 어느 날 해외입양인 지인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지인의 또 다른 해외 입양인 친구 역시 대구에서 미아로 발견돼 '백 백합 고아원'을 거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대구 경찰서를 통해 친부모님을 찾을 수 있었고, 대구 경찰서와 잘 아는 것 같으니 그 친구에게 연락해보라며 연락처를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이어져 대구 경찰서의 실종계 관련 담당 경찰관의 연락처를 결국 알아내게 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담당 경찰관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그 경찰관 분을 우리가 찾아볼 수는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절차 없이 개인정보에 맘대로 접속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선 그쪽에서 먼저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
친절한 목소리의 경찰관은 이어 말했다.
"먼저 남편의 입양 당시 서류 같은 거 있죠. 그걸 모아서 아무 경찰서나 가서 남편의 장기 실종신고를 해야 해요. 가서 지금 나에게 한 이야기를 다 설명하도록 해요. 그렇게까지 다 한 후에 별 진전이 없다 싶음 다시 한번 이쪽으로 연락해줘요. "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아, 그리고 웬만하면 그 DNA 검사도 해서 등록해둬요. 그래야 친부모님도 빨리 찾을 수 있을 테니."
"아... 네! 다시 연락드릴게요."
짧은 전화통화를 마치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남편은 잠깐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음... 그래... 뭐 언제 한번 가보지 뭐..."
'그래! 당장 가보자!!'가 아닌 '언젠가...'라 말끝을 흐리는 남편의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분명 남편은 무언가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자신에게 이름을 준 '표상석' 경찰관님을 찾으러 대구에 내려가 볼까? 이야기했을 땐 분명 신나 했는데, 지금 남편의 반응은 그때와는 다르게 매우 미지근하다.
남편은 주춤주춤 하더니 말을 꺼냈다.
"친부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들지만 사실 두렵기도 해. 만약에 정말 힘들게 살고 계시면 어떡해?모르고 사는 게 나았을 텐데라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
남편은 자신을 발견한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경찰관님을 만나 자신의 발견 당시의 상황들을 재확인하고, 당신의 이름을 이어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전하는 것까지는 하고 싶지만,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끝이 '친부모 찾기'로 이어질까 봐 겁내 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직 친부모님을 만나는 것까진 마음을 열지 못한 것이다.
남편에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시간이 째깍째깍 쉴 새 없이 흘러가는 걸 알지만 남편은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하다 했다. 그런 남편을 서두르라고 다그칠 수는 없었다. 사실 어쩌면 여기까지도 남편에겐 큰 도약이었다. 남편은 느리지만 자기 속도로 그동안 꽁꽁 싸매고 있던 자신의 과거와 입양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내고 있었다.
결국 우린 제대로 된 절차를 통해 '표상석' 이란 이름을 가진 경찰관을 찾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실종신고'와 'DNA 검사'는 '표상석 경찰관'을 찾는 것을 넘어 '친부모 찾기'로 이어지는 길이 될 것 같았고 그것은 아직 남편에겐 준비되지 않은 단계였다. 남편은 차근차근 하나씩 자신의 속도로 나아가고 싶어 했다.
해외 입양인 중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 아예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하지 않는 해외 입양인도 있다. 또한, 남편처럼 이도 저도 아닌 그레이존에 머물러 있기도 한다. 찾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거나, 찾고 싶다가도 아닌 것 같아 생각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을 반복하기도 한다. '한국에 왔으니 친부모를 찾아야지.'라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마냥 요구될 수 없다. 의무도 아니고 단지 해외입양인들의 선택권이다. 남편에게 친부모를 안 찾는다고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수 없으며, "시간이 없으니 빨리 친부모를 찾도록 해!"라고 강요할 수 없다. 남편이 미국으로 보내진 순간부터 사실 친부모를 찾을 의무는 없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포유류든 조류든 자신이 한번 품었던 새끼는 설사 실수로 자신의 새끼가 뒤바뀌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이 자기 새끼라 하고 키운다. 내가 한번 품었던 이상 내 새끼이다. 새끼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품어준 어미를 어미라 알고 따른다. 남편의 엄마는 돌아가신 메리고, 아빠는 미국에 계신 조이다. 인간의 세계에서만 유독 피가 물보다 진하다.
현재 남편의 뿌리 찾기는 그레이존에 머물러있다. 대구에 내려가 보는 것도 잠시 뒤로 미뤘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 이 글을 그때 그 '표상석' 경찰관님이 보게 되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