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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살리 Aug 19. 2021

화이트 릴리 베이비 홈

35년 전 보육원의 기록을 찾다. 

남편의 입양 서류에는 대구 파티마 병원에서 처음 미아로 발견되어 미국에 입양되기 전까지 생활했던 보육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영어로. 



White Lily Baby Home.  화이트 릴리 베이비 홈

'St. Paul Convent (세인트 폴 수녀원)' 안에 위치하는 'White Lily Baby Home(화이트 릴리 베이비 홈)'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지만, 단지 영문 표기를 한국식 발음으로 적은 '세인트 폴 수녀원'이나 '화이트 릴리 베이비 홈'은 온라인 상에 쉽게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White Lily'는 백합이고 'Baby Home'은 그 당시 고아원이라 불렸을 테니 '백합 고아원'으로 쳐서 다시 검색해 보았더니 정보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 대구에 '백 백합 고아원'이라는 곳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 백합 고아원'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대구 분원 안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세인트 폴 수녀원'이라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정보가 나오지 않았던 건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라고 한국에선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녀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나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여러 장의 사진들이었다. 


영문으로 쓰인 남편의 입양서류들을 읽을 때면 왠지 모르게 빨간 머리 앤 느낌의 화상들을 상상했는데 정말 내 예상대로 수녀원의 모습은 그 느낌 그대로였다. 80년대의 보육원은 왠지 삭막했을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수녀원은 그때도 지금도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남편이 보육원에서 보낸 시간들을 생각할 때면 늘 안타까웠는데 그래도 이렇게 예쁜 정원에서 뛰어놀았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안도를 했다. 


1915년에 지어진 수녀원은 긴 역사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녀원이 세워질 때 고아들을 수녀님들이 위탁하기 시작한 것이 보육원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몇몇 아이들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외국으로 입양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고 고아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자 1991년에 보육원에서 일반 어린이집으로 바뀌었다. 



"수녀원에 전화해볼까? "

직접 전화 거는 걸 어려워할 남편을 잘 알기에 먼저 제안했다.


그러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거기 가볼 수 있나?"


친부모를 찾는 것에 대해 지금까지 별 관심이 없었던 남편의 예상 못했던 답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머릿속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수녀원에 전화를 걸었다. '뚜뚜-' 신호음이 간다. 뭐라 하지 고민하는 사이, 나이 지긋하신 듯한 수녀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아... 제 남편이 해외입양인인데요. 백 백합 보육원에 86년까지 있다가 미국으로 입양을 갔거든요. 그곳에 꼭 방문하고 싶은 데 저희가 한번 찾아가도 될까요? "


일단 가서 확인해야 할 것 같다. 남편의 흔적을. 남편이 뛰놀던 정원, 보육원 창문으로 보았던 풍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백 백합 보육원에 있으셨구나! 지금은 백합 어린이집으로 바뀌어 없어졌지만 같은 장소니 언젠가 꼭 방문하세요. "


안타깝게도 지금 코로나 때문에 방문객을 받기 어려우니 조금 더 나아지면 방문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신다. 당장은 못 가지만 언젠가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했다.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수녀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제 우리의 전화를 받으신 수녀님이 어제는 특별히 말씀이 없으셨는데 감사하게도 '백 백합 보육원'과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신 수녀님께 이야기를 전달해주신 것이다. 해외입양인 남편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긴 대화의 끝에 수녀님께 물었다.


" 혹시 남편이 입양을 가기 전의 정보가 아직 그쪽에 남아있나요? "


" 보통은 남아 있어요. 한번 찾아볼게요. 생년월일이랑 이름을 다시 한번 말해주겠어요?"


한줄기 빛을 찾은 듯했다. 수녀님이 전화를 끊고 곧 다시 전화가 왔다. 35년 전의 남편의 정보가 아직 남아있다고 했다. 아무도 찾지 않았던 남편의 과거가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왜 진작 찾으려 안 했을까. 아니다. 지금이라도 더 늦게 찾기 전에 찾아서 다행이다.


수녀님은 차근차근 남편의 서류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읽어주었다. 남편이 미아로 발견 당시의 착장은 그때 수녀님이 말씀해주어 안 내용이었다. 둥근 얼굴에, 줄무늬 티셔츠와 빨간색 반바지를 입고 *하이칼라 머리를 한 아이. 수녀님은 서류를 읽어주시다 몇 번인가 목을 메이셨다. 남편이 가지고 있던 입양서류의 내용보다 훨씬 만은 정보들이 그곳에 있었다. 좀 더 자세하고 생생하게 남편의 어린 모습을 이젠 머릿속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남편의 한국 이름은 남편의 진짜 이름인 건가요? 아님 거기에서 누군가가 임의로 지어준 이름인가요?"


"그 이름은 말이지요... 남편분을 우리 백 백합 보육원에 데려다준 신암4동 파출서의 경찰관분의 이름이에요. 그 경찰관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쓰여있어요."


꼬여있던 실이 와르르 풀어져버렸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이 타들어 갔다. 살면서 많은 가슴 벅찬 경험들을 했지만 이 느낌은 조금 특별했다. 손끝부터 머릿 끝까지의 짜릿함이 꿈틀거리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쉴 새 없이 심장을 쾅쾅쾅 두드리고 몸과 마음을 있는 힘껏 흔들어 나를 깨운다.


수녀님의 전화를 끊자마자 남편에게 달려가 말했다.


"여보, 자기의 한국 이름은 정말 특별하네. 끝까지 가지고 있어."


수녀님과의 대화 내용을 전하는 내내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하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남편의 생각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오늘은 그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날임에 분명하다. 붉어진 그의 눈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샬트르 성바오르 수녀회는 1915년 10월 12일 세워진 후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는데 기여했다. 





남편의 입양서류에 적혀있던 몇 구절. 서류 말고는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남편의 과거. 보통은 부모님을 통해 우리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을 수 있다. 내가 어딘가에 존재했었다는 걸 굳이 서류가 말해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입양되기 전의 남편의 모습을 이야기해주고 기억해주는 것은 몇 장의 서류들 뿐이다. 한때는 분명 존재했었던 남편의 존재를 기억해주는 무언가 이기에 더없이 소중하다.



천천히 옷을 혼자 입고 벗습니다. 놀 때는 보통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을 흉내 내거나 혼자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어른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그들과 함께 할 때 매우 즐거워합니다.


남편은 지금도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기 때문에, 이 구절을 같이 읽던 남편과 나는 슬픈 이야기에도 한참을 웃었다.


 9시 정도에 잠이 들고 6:30에 일어납니다. 오후에는 두 시간 낮잠을 잡니다. 밥을 한 공기 국과 반찬과 함께 먹습니다. 고기나 생선 김치, 감자 등등의 반찬을 숟가락으로 먹습니다. 우유와 쿠키 빵을 하루 두 번 간식으로 먹습니다. 10개 치아가 다 있습니다. 친구들과 달리기 하는 것과 밖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천천히 점프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1부터 5까지 셉니다. 자신의 기분을 간략한 단어를 통해 말할 수 있고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나 보모가 노래하는 것을 따라 합니다. 어린이 TV 방송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른들에게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화장실 학습이 되어 있습니다.



보모의 노래를 따라 부르던 어린아이의 남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무슨 노래를 따라 불렀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혹시 남편의 기억이 플래시처럼 돌아올지도 모르니 이 노래 저 노래 남편에게 들려줘봐야 할까 싶다. 우리 고양이들에게 자장가를 가끔 불러주는데 아직까지도 남편의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아마 자장가는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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