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남편을 만나기 한참 전부터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지로 입양된 해외입양인 친구들 무리와 어울리며 지내고 있었다. 오랜 일본 생활 후에 한국에 갓 돌아온 나는 완전히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또 다른 이방인이었다. 한국이 오히려 낯설었고 앞으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 자신을 이방인이라 느끼는 - 해외입양인이나 외국인 친구들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그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의 삶은 다르지만도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 - 물론 남편의 삶의 고난들은 나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원이지만 - 피부색에 대한 차별을 느껴보았고,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넌, 그래도 달라!'라고 행해질 수 있는 차별에 대해서도 함께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확연히도 다른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가정에서 자라 왔는데도 -남편은 입양가정에서 나는 친가족으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받아왔던 본질적인 사랑의 형태와 방법들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물론, 남편의 경우는 운 좋게 좋은 양부모님을 만난 케이스이고, 모든 해외입양인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친자식을 버리고 학대하는 혈육의 부모도 있는 세상에 좋은 친부모, 나쁜 친부모가 있는 것처럼 해외입양 역시 너무 이분법 적으로 나누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해외입양인들의 삶의 이야기들은 보통 자극적인 것들로 더 포장되거나 강조되어 흑백으로만 인식하게 끔 세뇌되어 왔다. 큰 성공 후 모국으로 금의환향한 이야기, 친부모에게 학대당하거나 살해당한 비극적인 이야기는 미디어를 통해 많이 들어보았어도 소소한 행복 속에 살아가는 평범한 해외입양인의 이야기는 어째선지 일상에서 접하기가 어렵다. 그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해외입양'이란 소재는 일상과는 멀리 있고, 섣불리 입에 담고 이야기 꺼내기엔 조금 어렵고 불편한 소재로서 인식되어 왔다.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단순히 남편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고,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키워준 양부모님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해외입양인 남편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해외입양인의 삶의 이야기가 더 이상 다크하고 어려운 소재가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가족애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 사는 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래서이다. 해외입양인 남편의 삶 속의 행복한 페이지를 들추어 봄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이 해외입양인의 삶의 이야기에 쉽게 귀 기울이기 시작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각자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해외입양인'을 이해해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완성했다.
남편의 16년이라는 긴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남편과 남편의 한국생활은 애증의 관계가 되어 아직도 치고받고 한다. 하지만 난 그래도 사랑 쪽이 더 큰 애증이라 믿는다.
남편이 몇 년 전 일본에서 열린 아마추어 아이스하키 경기에 나간 적이 있다. 한국에서 온 팀으로 출전하긴 했지만 팀의 선수들은 주로 한국에 사는 캐나다, 미국 출신의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단지 '한국팀'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팀 유니폼을 맞춰서 입고 나왔는데 각자 왼팔에 자신의 국가의 국기를 새겨 입기로 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하나 둘 자신의 국기를 왼팔에 붙인 채 스케이트를 타고 링크장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유유히 미끄러져 나오는 남편의 왼쪽 팔에 붙어있는 성조기가 보였다. 잠시 후 남편이 획 몸을 돌리며 턴을 했다. 남편의 반대편 오른팔에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남편을 이토록 잘 알기에, 그것이 얼마나 남편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욱이 잘 알기에 눈물이 나왔다. 나를 낳아준 고국이지만 나를 버리기도 한 원망스럽고 밉기도 한 존재편에 서기까지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남편의 해외입양인으로서의 삶 속에는 소박한 행복들로 치유되어 온 잔잔한 흉터들이 아직 남아있다. 하지만 그 흉터들을 애써 반창고로 가리지 않는다. 잔잔한 흉터들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삶의 흔적들이다.
완전한 내리 사랑을 이 생에서 느끼게 해 나의 부모님, 남편을 사랑으로 키워주신 돌아가신 고 Mary 시어머니와 Joe 시아버지께 이 책을 바칩니다.
2021년 10월 어느 날, 브런치북을 마치며
유승민(Sal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