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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Dec 13. 2020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박서영)

그림책의 가르침

성장은 언제나 균열과 틈, 변수와 모험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림책과 할머니. 이 두 단어만으로도 나를 끌어당긴 책이다. 어쩌면 나도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그림책'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타샤 튜더'다. 타샤 튜더는 훌륭한 정원과 오래된 저택에서 아기자기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곱게 나이 든 소녀 같은 할머니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녀는 평생 해 온 자기만의 일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베테랑 그림책 삽화가다. 재택근무의 원조격인 셈이다. 일과 집을 모두 사랑스럽게 꾸려나가는 그녀이기에, 더욱 당당하고 멋져 보인다. 그래서 닮고 싶은 할머니다. 그림책과 할머니는 참 잘 어울린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다양한 내용의 그림책과 함께, 그 안에 깃든 의미들을 우리의 삶에 녹여서 차근차근 이야기해준다. 나는 책을 통해 어떤 지식을 쌓아가는 것보다는 주로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지혜를 얻고자 하는 편인데, 그림책을 통해서 단순하지만 정확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그림책과 그에 대한 작가의 말을 하나씩 옮겨보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상처도 후회도 없다. 그러나 성장도 없다. 성장은 언제나 균열과 틈, 변수와 모험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간극을 메우고 틈을 좁히고 서로 어긋난 것들 속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야 비로소 우리는 조금 자랄 수 있다.

 김승연의 《마음의 비율》와 사노 요코의 《태어난 아이》 그림책을 소개하면서, 작가는 태어남에 대한 다른 시각을 알려준다. 아이들이 태어난 것은 부모의 선택이 아닌 아이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나의 의지로, 한 인간이 되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세상이 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이 필요해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큰맘 먹고 이 세상에 나왔는데, 그렇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동안에도 사는 게 꽤 재미있었다. 하고 싶은 것이 계속 생겨났고, 오래된 삽질의 결과로 뜻밖의 기회들이 속속 찾아왔다. 다시 덮은 구덩이 곳곳에 어떤 씨앗들이 나도 모르게 심어졌다는 사실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분명 오래전 내가 판 구덩이에서 난 싹임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다니카 슌타로가 쓰고 와다 마코토가 그린 《구덩이》에서는 말 그대로 삽질만 하는 아이가 나온다. 그 아이는 사람들의 훈수에도 묵묵히 구덩이를 파고, 결국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애써 판 구덩이를 다시 덮어버린다. 나 또한 그랬다. 자유가 없었던 학생 신분일 때까지는 덕질을 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모으고, 방송을 보고, 라디오를 녹음하고, 라이브를 포함한 모든 노래를 엠피쓰리에 넣어두고 무한 반복해서 듣고, 각종 굿즈와 사진들을 모으고, 책마다 사진을 붙여놓고, 없는 돈 모아서 콘서트 티켓을 샀다. 공부를 해야 했던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삽질이었다. 정서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만화책도 허락받지 못했던 나에게 이 삽질만은 부모님의 묵인으로 실컷 할 수 있었다. 다른 삽질은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해볼 용기도 없어서 시작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나의 삽질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고향이 아닌 곳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어서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우선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들어가서 처음 기타 줄을 잡아보고, 연말 공연까지 하였고, 한창 인기였던 국토대장정을 하고, 요리학원을 다니고, 유럽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마음 가는 곳으로 여행을 하고, 공연과 전시회를 보러 다니고, 취업과는 하나도 관련도 없는 각종 대외활동을 하고, 청강을 하러 다니고,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인턴과 아르바이트 선택도 전혀 전략적이지 않았다. 버킷리스트를 만들고, 남들이 하는 건 다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것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삽질의 매력이며, 삽질은 하고 싶을 때 해야 제맛이다. 어떻게 보면 이 삽질들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고, 지금 하는 직업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있는 일들을 무슨 도움이 된다고 돈과 시간을 버렸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했으니 후회는 없다. 한편으로는 그때의 삽질 경험이 지금의 내가 버텨나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고, 앞으로 나에게 어떤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거라고 믿고있다.


...떠나기 전 무채색이었던 내부가 색색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하나의 경험이 일어난 후에 한 사람의 안과 밖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마티아스 더 레이우의 《멋진, 기막히게 멋진 여행》에서 한 남자가 자기가 살던 오두막을 부숴 만든 긴 나무다리로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 나무로 다시 집을 만드는 것으로 끝나는 내용이다. 나는 어떤 여행을 결심할 때, 늘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한 번도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떠나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여행보다는 집과 안정을 원하는 사람일까? 그래도 나는 늘 여행을 꿈꾸고, 다른 세상에서 다른 내가 되어보는 생각을 한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과 양분이 된다.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지에서 적응하고 즐기는 과정은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다. 이 도전을 흡족히 마무리하고 돌아올 때면 나의 내면은 색색깔로 칠해져 있는 것처럼 오감이 깨어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 때문에 또다시 '언젠가는'을 꼽아보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세계 위에 내 세계를 겹쳐보는 일이다. 어떤 이야기도 읽는 이의 세계를 넘어서지는 못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의 나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동시에 읽는 수만큼의 이야기다. 한 사람이 지나는 삶의 시기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좋은 이야기일수록 더욱 그렇다...가보지 않고 장담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걷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걸음걸이라고...그러니 언제나 최선은 자신을 믿고 매 순간 가장 나다운 걸음걸이로 걷는 일일 뿐.

 셸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떨어진 한쪽, 큰 동그라미를 만나》의 이야기에서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양을 가지고 태어나고, 부족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와 하나가 되기보다는 각자가 온전한 자신이 되어가려는 노력을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과, 자신에게 맞는 모양은 다 다른 것이라는 이야기다. 남에게 의존하는 게 아닌, 스스로 자신을 굴려나갈 줄 아는 멋진 개개인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게 바로 인생이다. 작가가 이 그림책을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과 지금 읽을 때의 느낌이 달랐던 것처럼, 나도 나중에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조금 더 다르게 생각을 하게 됐으면 좋겠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반대로 종종 예전에 썼던 글을 읽어보면서 지금의 나보다 더 현명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만나며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중에 어떻게 변했는지를 비교해보려면, 이렇게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 같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 또한 있다. 때를 기다리고, 소중히 여기고, 작은 기쁨을 함께 나누며 어떤 부조리나 위화감도 없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이 있다. 각각의 달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의미와 기쁨을 지녔고 어떤 생명이라도 존중을 받는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낸 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하나씩 꺼내 먹을 앵두 맛 박하사탕이 얼마나 맛있을지 나는 상상할 수도 없다.

 도널드 홀이 쓰고, 바버라 쿠니가 그린  《달구지를 끌고》에서는 농부 가족의 삶이 나온다. 나 또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농부의 삶을 항상 동경하곤 한다. 텃밭을 가꾸면서 이런 생각이 더 자주 들었다. 지금 당장 농부의 삶을 실현할 수는 없겠지만, 도시의 생활에서도 늘 농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생활한다면, 삶이 조금은 더 아름다워질 것 같다. 일상 속에서 기쁨을 찾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소중한 가치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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