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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Oct 29. 2020

이방인/ 알베르 카뮈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순수한 영혼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까뮈의 소설은 언제 한번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기회가 되어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다. 어떤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줄거리는 간단했으나 인물의 묘사, 의식의 흐름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 집중을 해서 읽어나가야 했다. 불어를 공부했지만 까뮈의 소설은 처음이었던 나에게 까뮈의 '이방인'은 다시금 프랑스 특유의 문학을 상기시켰고, 중간중간 어떤 향수도 일으키는 듯했다. 그래서 까뮈의 독특한 문체를 원서로도 한번 읽어보아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방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뫼르소의 어머니 장례식 내용이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읽었던 나에게도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무심한 듯한 태도로 일관하는 듯 보였는데, 결국 이 미묘한 행동들이 법정에서 뫼르소를 사형까지 몰고 가게 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도입부, 관리인이 어머니를 보겠냐고 물어볼 때, 안 보겠다고 뫼르소가 단답하는 부분, '나는 엄마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꺼릴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등 어머니의 죽음과 현재 욕구나 감정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부분들이 나중에 뫼르소가 재판장에 갔을 때 계획적인 살인의 증거로 검사의 말을 통해 주장된다. 나도 어쩌면 세상 안에 속해있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어서 사회의 관습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기준에 벗어나는 사람들을 소설 속 재판장에 있는 사람들처럼 평가하고 판단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가 거짓을 말하거나, 자기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말을 과장한 부분도 없는데, 그는 계획적인 살인범이 되어 결국 단두대 사형을 집행당하게 된다.

 또한 2부의 재판과정도 흥미로웠는데, 뫼르소는 본인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발 떨어져서 상황을 관찰하고, 검사와 변호사에 의해서 본인의 동기와 마음이 만들어져가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특히 재판장에서 뫼르소가 혼자서 생각하는 장면 중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논고와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그러나 나로서는 어딘가 좀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대로의 걱정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견을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 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나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에서처럼 모든 재판과정이 피고인의 운명을 피고인의 동의나 참여없이 결정되고 있는 모순적인 현실을 묘사하고 있었다.

 국가나 사회, 직장에서 올바른 정의나 도덕은 어떤 것이라는 규정을 지어놓고 그것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고 당연시하고, 개개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것들이 고정불변이 되어 개인의 생각과 감정보다 우선시 된다면, 다수를 위해 소수의 삶이 희생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양성이 결여된 사회에서 나 자신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다면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좋은면이 있으면 나쁜면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소신있게 살아가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 까뮈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고, 나 또한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뫼르소는 남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진실과 침묵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의 관습이나 굴레에 정신적으로 얽매이기보다는, 오히려 어린아이같은 가장 순수한 사람이다.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자유를 억압당하게 된다. 1부에서는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고장에서 저녁은 우수에 젖은 휴식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내가 느꼈던 기쁨이었다.', '물은 차가웠고, 나는 헤엄을 치니 흐뭇했다. 마리와 나는 함께 멀리까지 나갔고, 우리 두 사람이 몸놀림과 만족감에 있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는 부분과, 2부에서는 '하지만 구금 생활 초기에 가장 힘든 점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나는 바닷가에 가있고 싶었고 바다 쪽으로 내려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는 짧은 한순간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기억해 냈다. 굴러가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했던 한 도시의, 그리고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어떤 시각의 귀에 익은 그 모든 소리들을 되찾아 냈다.'에서 뫼르소가 느끼는 '자유'의 감정이 가장 일상적인 모습들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교도소 부속사제의 면회가 왔을 때, 뫼르소가 마침내 자신의 생각이 폭발하게 된다. 그는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나의 정당성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아.'라고 외친다. 이 부분에서 그가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사회의 '이방인'이 아닌, 오히려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진실된 한 인간으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에 그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뫼르소는 사형집행 전 마침내 어머니의 죽음에서 자기자신의 죽음을 연결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야기 초반에는 엄마의 죽음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마침내 죽음을 앞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에 후회나 원망도 하지 않고 죽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형수'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후회없이 진실되게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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