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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Apr 06. 2021

이반 일리치의 죽음/ 똘스또이

괜찮은 삶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오래 지났는데, 정리하는 게 막막해서 망설이다 이제야 글을 적어본다. 마치 큰 숙제를 마무리한 기분이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그 안에는 똘스또이의 삶에 대한 깊은 철학이 응고되어 담겨있는 작품이었다. 이 책의 제목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내용도 마찬가지로 이반 일리치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사는 동안 어떤 신념을 가졌고, 가족과 어떻게 지냈고,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 독자는 관찰하듯이 읽어 내려가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법원에서 일하는 괜찮은 직업을 가졌고, 적당한 아내와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낳아 좋은 가정을 꾸렸고, 돈도 어느 정도 벌어서 괜찮은 집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특별히 불행한 것이 없는 '보통사람'이었던 그의 인생이 한순간 뒤바뀌게 된다. 그가 병에 걸려 하루하루 죽어가게 된 것이다. 결국 자신의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 그는 자신이 '잘못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하게 그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아주 불쾌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반 일리치는 대학교가 있는 큰 도시의 수석판사직을 내심 노리고 있었는데 곱뻬라는 동료가 그를 제치고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해 갔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큰 충격을 받았고 곱뻬는 물론 가까운 상관을 찾아가 이번 인사가 잘못된 것이라며 항의하고 언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에 대해 냉담했고 결국 다음 인사이동에서도 그는 뒤처지고 말았다.


 이반 일리치가 생전에 겪는 모든 일들이 남일 같지 않아서 놀랐다. 그중에서 동료에게 자리를 뺏긴 내용이 기억에 남는데, 나도 늘 겪는 일이라서 공감이 많이 갔다. 이런 경우에 얼마나 자괴감이 드는지는 겪어본 사람은 알 수 있다. 그동안의 내 모든 노력이 영문도 모른채 일순간에 무의미해져 버리고, 더 이상 그 어떤 노력도 부질없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도대체 정의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조차 희미해져 버린다.

 이러한 순간을 정말 주의해야 하는데, 내 삶의 가치관이 부서질 수도 있는 순간이다. 이럴 때는 '분명 더 큰 무언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정신승리를 하거나, '에라, 됐다' 하면서 미련 없이 떠나버려야 한다. 이때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그 선택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돌고 돌아 첫 단추를 다시 푸는 수밖에 없다.




... 그리고 이제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맹장? 신장이라고?' 그는 혼잣말을 했다. '맹장도 신장도 다 문제가 아니다.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다...... 그래, 아직 살아 있지만 생명이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는데 난 잡을 수가 없다. 맞다. 더 이상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나 말고는 모두들 다 분명히 알고 있다.

... 거짓말 외에, 아니 그런 거짓말 때문에 사람들이 이반 일리치가 바라는 만큼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던 중 어떤 때에는, 사실대로 고백하기 좀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아픈 어린아이 대하듯이 그렇게 가엾게 여기며 보살펴주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그는 바랐다. 지위가 높은 관리이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였던 그에게 누구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결국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삶을 사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어떤 것도 진심으로 대한 것이 없었다. 그는 가족조차도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가정을 꾸리기 위한 조건으로만 생각했다. 결국 그는 하인 게라심 외에는 병든 자신을 진심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의 병에 대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면서도, 그는 자신의 인생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늘 성실히 일했으며,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것이 허영과 가식이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에는 전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높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에 맞서 싸우고 싶었던 마음속의 어렴풋한 유혹들, 생각이 나자마자 신속하게 털어버렸던 그런 은밀한 유혹들, 어쩌면 바로 그런 것들이 진짜고 나머지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마침내 그가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성찰하는 장면이다. 그에게 삶을 바로잡을 수많은 기회가 있었고, 진정한 내면의 행복을 위한 길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현재의 나도 과거의 내가 한 선택의 끝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서 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남들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의 시선이 바탕이 되어야만 뒤늦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내 양심의 소리에 고요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나중에는 거짓으로 이루어진 삶을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고로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사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 보았다. 어떤 명확한 답을 얻기는 힘들지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져보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말 어렵고 외로운 과정이다.)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잘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떳떳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 행복한 것을 알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올바르게 싸워나갈 배짱과 용기를 지녔다면, 충분히 훌륭한 인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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