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꼭 맞는 여행지
나는 여행이 좋다. 여행 계획 세우는 것도 너무 좋다. 떠난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다. 예전의 여행을 추억하는 것도 참 좋다. 더운 여름의 습기 속에선 건조하고 차가웠던 겨울날 공기를 생각하며 잠깐 동안 더위를 잊는다.
서른이 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업무 스트레스로 질려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던 나는 2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혼자 외국에서 보내리라고 급작스레 마음을 먹고 거의 출발 이주 전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디데이 전날까지 겨우 일을 끝마치고, 가족과 연인, 친구와의 크리스마스도 뿌리치고 홀홀이 비행기에 올랐다.
나의 목적지는 핀란드.
추운 겨울을 겨울왕국에서 보내보고 싶었다.
그냥 갑자기 핀란드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크리스마스를 느껴보고 싶었고, 귀여운 순록과 무민, 산타할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었고, 따끈한 시나몬 롤을 먹어보고 싶었고, 꿈같은 오로라와 차갑고 맑은 호수를 느껴보고 싶었고, 북극 한계선을 밟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첫 홀로 여행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헬싱키는 생각했던 것처럼 조용하고 편안한 도시였다. 어떤 사람들은 딱히 볼 게 없고 심심하다고도 하겠지만, 나한테는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했다. 트램으로 시내 어디든 이곳저곳 다닐 수 있었고, 사람들이 과하지 않게 정이 있었고, 산책할 수 있는 곳들이 많았고, 싱싱한 연어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세련된 디자인도 거리마다 쉽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핀란드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긴긴 저녁이 기분 좋은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참 묘한 곳이었다.
아침마다 하릴없이 동네 산책을 다녔는데, 다른 유럽에서 흔히 만날 수 있었던 부랑자나 추근거리는 이들이 아닌, 홀로 혹은 강아지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평범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의 일상을 공유하며 핀란드의 담백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로바니에미에서 하룻밤의 꿈과 환상을 보고 다시 나의 헬싱키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미래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충동을 부추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었는데, 만약 그때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많이 후회했을 것 같다.
처음 트램을 타기 위해 끊었던 티켓, 북극 얼음물에 둥둥 떠서 오로라를 기다렸던 시간, 엘프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마을, 진저 쿠키에 구운 마시멜로를 포개 먹었던 맛, 말이 안 통하는 낯선 사람들과 포근했던 저녁 시간, 눈숲을 가로질러 달렸던 썰매개들, 유일한 1인용 테이블에서 먹었던 순록 모양 감자요리, 새벽 첫 비행기를 타려고 두 시간 자고 깜깜한 길에서 현지 예약택시를 기다렸던 시간, 마지막 날 터져버린 캐리어 때문에 몰에서 허겁지겁 캐리어를 샀던 일.
일주일도 안 된 무모하고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과 용기가 내 마음 안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결국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때 나는 핀란드에 있었고, 그 이후 아직까지 나의 마지막 여행으로 기억되고 있다. 다음에는 여름에 엄마랑 또 와봐야겠다는 생각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다.
다시 한번 호수의 나라에 가 볼 수 있을까?
예전처럼 아무 걱정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