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찬 공허함
무언가가 세게 치고 지나갔을 때, 방금 뭐였지 싶은 마음. 지나간 자리를 넋없이 바라보면서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덤덤함이 조화롭게 맞물린 상태이기도 하다. 헛헛하면서도 조금은 외로운 감정이 에워싸는 짙은 파란색이 떠오른다.
잠깐이기를 바랬던 허무하다는 느낌이 요 며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고, 없는 감정 인척 위장도 해봤다. 텅 비어있어서 없는 셈 치기가 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대화를 할 때, 아무것도 없는 차가운 공기를 상대에게 들킬까 봐 스스로 좁아지는 기분이었다.
큰 한방을 먹었다기엔 누구의 말 따라 힘든 일은 계속될 텐데. 나약하게 주저앉은 모습이 그렇게나 밉게 보였다. 스스로를 미워하니, 뭐가 더 예뻐 보일 수 있을까. 일어나려고 애쓰고 다시 누워버리고, 또 갑자기 일어나 달려도 봤지만, 차가운 공기는 도대체 데워질 생각이 없었다.
빈 곳을 쉽게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0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노력, 열심히 애쓰려고 하면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저지했다. 간신히 정신을 다잡으며 최선의 열정을 부으려고 했던 지난날을 부정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주문만을 되뇌었다. 억지로 채우지 않겠다 다짐했다.
나름대로 효과는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끝까지 미뤄놓은 탓에 굽신거리면서 사과해야 했지만, 내 안의 게이지는 0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차피 쌓아둔 것 없는 내 이력을 부풀리기보다는 쿨하게 0이라는 상태를 인정했다. 다시 시작. 너무나도 허무하지만, 이전 것을 지우고 새로운 경험을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이 이뤄갔으면 했던 일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태도, 응당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 밖에도 많은 제약과 책임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텅 비어보니, 그제야 얼마나 많은 부담감이 내 안을 채우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당분간은 이 공허함을 즐겨볼까 한다. 신나는 일도,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슬픈 일도 없다. 어떻게 보면 나를 방해하는 감정과 상황이 없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이 상황 안에 잠시만 푹 잠겨있을 거다.
정신을 차려보니,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 와있다. 이제껏 이맘때쯤이면 크리스마스 - 새해 - 생일의 연속선에서 매일이 파티 같은 기분을 즐겼었다. 이번 해만큼은 허무한 감정을 맘껏 부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