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은 Dec 07. 2019

낯섦

1744!

누구나에게 애정 하는 번호가 있다. 나의 경우는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우리 집 전화번호다. 1744. 어린 나를 붙들고 엄마는 이 번호를 나에게 기억하도록 열심히 가르치셨다. 엄마의 가르침은 성공한 듯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부여했을 저 번호는 지금 내 삶에 아주 깊숙이 존재하고 있다. 13년가량 쓰고 있는 휴대폰 번호 뒷자리도 1744다.


모든 이메일 주소는 sally1744이다. sally에 대해서도 설명해보자면. 영어유치원에서 나의 정체성이 결정됐다. 오직 선생님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로. "성은이는 Sally가 좋겠어요."


영어 이름을 지어와야 한다는 나의 말에 무작정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엄마. Sally라는 내 인생 두 번째 이름을 부여받았다. 영국에서도 발음하기 어려운 한글 이름 대신 샐리로 친근하게 불렸다. 그 희미한 시점 이후로 모든 내 아이디는 sally와 1744의 조합이다. 이 단어와 숫자의 배열 혹은 규칙은 내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삶에 온전히 붙어있었다.


수동적으로 얻은 숫자지만, 지금은 너무나 애정 해서 나와는 뗄 수 없는 숫자가 되었다. 가끔씩 매일 쓰던 맞춤법이나 자음과 모음이 조합이 어색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숫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면 조금 낯설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의미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무의미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의미는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요."


애써 무언가의 의미를 찾으려다보면 더욱 낯설어지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의미'와 거리가 생긴다. 그 낯섦은 꽤 당황스럽다. 나에게 우연히 주어진 그 숫자의 의미를 찾으려다가, 오히려 그 숫자가 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의미 없는 것들을 사랑해보기로 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곰곰이 생각해서 얻어지는 애정 말고, 일시적이고 파편적일지라도 느껴지는 감정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아무런 생각 없이 1744를 누른다. 누군가에 내 아이디를 알려줄 때도 1744를 보낸다. 합격자 명단에서 동명인을 가르기 위해 써놓은 번호 네 자리도 1744였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이제는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1744가 나를 꼭 지키고 있는 것 같아 귀여워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안한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