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춘당』 고정순
추석은 다들 잘 보내셨나요? 올해 차례상은 차리셨나요? 혹시 상차림 중에 유난히 기억나는 것이 있으신가요? 전 올해 추석엔 동그랗고 빨간 사탕 ‘옥춘당’이 눈에 띄었습니다. 옥춘당 (玉春糖)은 전체가 빨간 것도 있고 알록달록한 것도 있죠. 조상님들이 오는 길을 밝혀준다는 의미로 명절 상에 빠지지 않고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시어머니는 이제 아이들도 컸으니 먹을 사람도 없는 빨간 사탕 ‘옥춘당’은 상에 올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초코볼이나 다른 사탕을 놓곤 하셨죠.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번 추석 상차림에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옥춘당 봉지가 보였습니다.
어린 시절 혓바닥이 새빨개지던 추억을 떠올리며 하나 깨물어 보려는데 너무 딱딱했습니다. 살살 녹이며 간신히 하나를 먹었습니다. 너무 달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다시 '옥춘당'을 보았습니다. 집 근처 도서관 그림책 이야기 시간에 고정순 작가를 만났기 때문이지요. 고정순 작가님은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들을 맛깔나게 풀어주셨죠. 작품 『옥춘당』은 오롯이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두 분은 정말로 그렇게나 다정하셨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싸우는 엄마 아버지와 대비되어 ‘부부’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이 왔다는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박장대소했습니다.
고자동 씨와 김순임 씨는 전쟁고아였다.
고자동 씨와 김순임 씨는 기차역이 있는 작은 도시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살아갑니다. 알뜰한 김순임 씨에게 날마다 지청구를 듣는 고자동 씨는 너스레를 떨면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고정순 작가는 여름이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집에서 푸근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 시절이 자신의 삶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할아버지 고자동 씨는 손녀의 입에 부인 김순임 씨의 입에 동그랗고 빨간 사탕 옥춘당을 넣어주었습니다. 김순임 씨는 그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곤 했습니다.
버팀목이던 고자동 씨는 폐암 말기를 선고받았습니다. 고자동 씨는 김순임 씨가 걱정되었습니다.
공구 상자는 신발장에 있어.
형광등은 혼자 갈아 끼우지 말고!
난방비 아낀다고 겨울에 춥게 있지 말고
휴지 아낀다고 궁상떨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음 애들한테 사 달라고 해.
고자동 씨가 떠나고 김순임 씨는 말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정신을 잃고 오줌을 싸기도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조용한 치매’라 했습니다. 온종일 김순임 씨를 돌봐줄 수 있는 이가 없었기에 요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양원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자기 말만 했습니다. 김순임 씨만 조용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김순임 씨는 종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지냈습니다. 김순임 씨는 고자동 씨가 떠난 지 20년이 지난 어느 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김순임 씨는 이제 고자동 씨를 만났을까요?
대부분 사람에게 ‘옥춘당’이란 그냥 어린 시절 명절 상에 오르내리던, 입안을 빨갛게 물들이던 사탕으로만 기억되겠지요. 고정순 작가에게 ‘옥춘당’이란 추억이고 사랑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기억될 겁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치매나 슬픈 이별에 대한 것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으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슬픔보다는 사랑과 행복한 추억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제 부모님 두 분 모두 막내셨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돌아가셔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책을 읽는 내내 150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작고 가녀린 몸매의 외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당신 키만큼이나 긴 머리를 참빗으로 곱게 빗어 내리고 쪽을 지어 은비녀로 단정하게 꽂으셨습니다. 할머니의 은비녀는 아무런 무늬도 없고 낡았지만 어린 제게는 참 곱고 예뻤습니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그 비녀가 꼭 함께 떠오릅니다.
할머니가 화내는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늘 푸근한 미소로 손주들을 안아 주셨습니다. 당신 막내딸이 안쓰러워 70세가 넘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저희 집에 자주 들르셨다고 합니다. 그 덕택에 할머니를 그나마 많이 보았나 봅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 밤 무척 고통스러워하시다 구급차에 실려 가셨습니다. 그 뒤로 할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위암이었다고 합니다.
고정순 작가의 ‘옥춘당’이 제게는 누렇게 바랜 ‘은비녀’입니다.
여러분의 ‘옥춘당’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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