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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잠시만요

비행기도 멈추게 하는 수능인데…

by 발자꾹

“다녀오겠습니다!”

뜨끈한 소고기뭇국을 먹고 아들이 집을 나섰다. 평소에도 뭇국을 좋아하는 녀석인데, 수능 도시락에도 꼭 넣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음식이 바뀌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남은 일주일 동안은 매일 뭇국을 끓여 달라고 덧붙였다. 유치원 때부터 늘 학교 급식에 익숙했던 녀석이 낯선 곳에서 시험 본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트레스일 터였다. 그 정도는 엄마가 해줄 수 있다며, 나는 뭇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비싼 외투나 신발을 사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침에 뭇국 끓이는 게 대수랴 싶었다. 아침마다 무항생제 사료를 먹인 한우 양지를 압력솥에 푹 익히고 국물을 우렸다. 국물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면 늦게까지 공부하다 잠든 아들은 간신히 눈을 뜨고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국물이 우러나는 동안 싱싱한 무를 나박나박 썰었다. 도마에서 나는 경쾌한 칼질 소리와 시원한 내음은 우리 집 아침의 시작이었다.

때론 덩어리 고기로 또 때론 잘게 썰어 놓은 고기로 엄마의 뭇국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사흘쯤 지나니 고깃국 냄새도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국을 끓이는 나는 점점 질리는데, 아들은 물리지도 않고 날마다 국물이 시원하다며 한 그릇 뚝딱 먹어 치웠다. 한 솥 끓여 며칠 먹으면 편하겠지만 그건 아니 될 말이다. 수능 날 맛과 맞추려면 날마다 정성을 다해야 했다. 2017년 11월 15일. 수능을 하루 앞둔 그날도 어김없이 뭇국을 끓였다.

그런데 오후에 난리가 났다. 휴대전화가 불이 난 듯 연신 울려댔다. 포항에서 규모 5.4의 강진이 났다는 속보가 떴다. 모두의 눈은 포항으로 쏠렸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 이렇게 큰 지진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문제는 수능이었다. 당국에서는 예정대로 16일에 수능을 치른다고 발표했다. 마음을 다잡았지만 뒤숭숭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방송대 중문학과에 입학해 두 번째 인생을 꿈꾸고 있었다. 그날은 마침 2학기 출석 수업이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쌀쌀한 날씨에 옷깃을 여미고 버스를 탔다. 교수님의 열성적인 강의와 늦깎이 학생들의 열기가 어우러져 강의실은 후끈했다.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이미 친해진 사람끼리 정보를 나누는 거로 여겼다. 2학기 편입생이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나는 조용히 책을 보다가 잠깐 눈을 붙였다.

밤 9시가 훌쩍 넘어 수업이 끝났다. 서둘러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챙겨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사람들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연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귓가에 ‘수능 연기’라는 단어가 스쳤다. ‘연기라니?’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정상적으로 수능을 치른다고 했었는데…. 급히 뉴스를 확인해 보니 정말이었다. 수능이 일주일 연기됐다. 여진이 이어져 수험생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대한민국에서 ‘수능’은 그 어떤 권력 서열보다 윗자리를 차지한다. 수능은 관공서와 기업체의 출퇴근 시간도 바꾸고, 영어 듣기 시험 때는 활주로의 비행기도, 군의 포사격도 멈춘다.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수능이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포항 시민들의 안전을 걱정하면서도 아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더 노심초사했다. 이기적인 엄마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들에게 전화했다. 아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수능 연기된다는데 어떡해?”

“괜찮아요, 엄마. 오히려 일주일 더 공부할 수 있잖아요.”

아들의 리듬이 깨질까 봐, 의욕이 떨어질까 봐, 괜히 불안해했던 내가 엄마로서 부끄럽고 미안했다. 다독여 주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도리어 수험생 아들이 엄마 마음을 달래주었다. 옷깃을 꽁꽁 여며야 할 만큼 추운 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낯선 곳에 대피하느라 고생했을 포항 시민들과 수험생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웠지만, 아들의 의연한 목소리에 마음이 한결 놓였다.

집에 돌아와 아들을 꼭 안았다.

“그럼, 뭇국은 어떻게 하지?”

아들은 호기롭게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 더 끓여주시면 되죠.”

아아~~

하루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겐 무 일곱 개와 양지머리 일곱 덩이가 생겼다. 다음 날 아침, 부엌은 다시 뭇국 냄새가 피어올랐고, 도마 위에선 ‘이번엔 제발 무사히 치르게 해달라’는 마음이 칼끝에 실렸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다시 뭇국을 끓였다. 아들은 매일 아침 뭇국을 먹고 학교에 갔다.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면서 초조함이 보였지만, 아들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고, 나는 그저 평소처럼 편안하게 해주려 노력했다.

이미 누군가는 참고서를 팔아버리고, 또 누군가는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참고서를 다시 찾느라 여기저기 북새통이었다. 아들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차분히 공부했다. 그리고 2017년 11월 23일 마침내 수능이 끝났다. 다행히 더 큰 이변 없이. 전국의 수험생들이 시험을 마쳤다. 아들도 무사히 대학에 진학했다.

그 시절 고사장 풍경. 초상권 침해를 걱정해서 인물은 다 뺐습니다. 좀 스산한가요? 그래도 그저 시험을 치렀다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다시 찬 바람이 분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때 가슴을 졸이며 뭇국을 끓이던 순간들이 떠올라 애써 가슴을 쓸어내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날이 오면, 전국의 하늘길이 멈추고 온 나라가 아이들의 하루를 위해 숨을 죽인다. 그 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동안 애쓴 전국의 수험생들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모든 이들이 평안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브런치 마을에도 지금 이 순간 마음 졸이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형, 누나, 동생,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있겠지요? 수험생은 물론이고요. 모두 무탈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어디에 있든 어떤 학교를 가든 그저 무탈하기를 또 무탈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omn.kr/2fz9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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