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과 마음 길이 시선에게서
제목이 이상했다. ‘시선으로부터,’ 쉼표는 무얼까?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가? 자꾸 시선이 간다. 책을 펼치자마자 내 오해가 풀렸다. ‘20세기를 21세기처럼 살다 간 여인 심시선’으로부터, 다. 거친 논쟁으로 시작한다. 제사를 거부하는 할머니, 심시선 여사와 씩씩대는 토론 상대 그리고 난감한 진행자.
우리의 엄마들에게 제사는 너무도 큰일이었다. 한 번은 이젠 아버지 제사를 산소에 가는 방식으로 가볍게 하자고 했다가 돌을 맞을 뻔했다. 진취적이라 여겼던 막내까지 거들었다. 그럴 수는 없단다. 왜 그럴 수는 없을까? 조상과 부모가 없었다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조상을 기리는 방식이 그저 형식이라면, 이젠 거둬들이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심시선 여사 의견에 크게 한 표 던진다.
엄마의 유언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던 집안에서, 큰딸 명혜가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제사를 지내자고 한다. 심시선 여사가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하와이에 가족들이 함께 가서 그녀에게 보여주고픈, 추억이 담긴 무언가를 제사상에 올려놓자고 한다. 처음에 다들 무슨 소리냐며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결국 손자 손녀들까지 함께한다. 그만큼 심시선의 영향력이 컸던 걸까. 끈끈한 가족애의 승리일까.
명혜는 하와이에 도착한 첫날, 훌라에 매력을 느껴 돌아오는 날까지 배운다. 둘째 딸 명은은 화산섬에 갔다가 만난 이가 건네준 레후아 꽃과 화산석을 제사상에 올린다. 의붓딸이지만 친자식이자 친 형제자매처럼 지내는 경아는 엄마가 사랑하던 커피가 생각나 엄마에게 가장 맛난 커피를 선물하기로 한다.
강한 딸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별로 없는 아들로 자라온 명준은 해양쓰레기로 만든 재생 플라스틱 탑을 상에 올린다. 명준의 아내 난정은 시어머니와 큰 추억은 없지만 미국에 있는 딸이 참석한다기에 겸사겸사 함께한다. 하와이 하면 훌라와 함께 제일 먼저 떠오르는 꽃목걸이 레이를 만들어 올린다. 큰 사위 태호도 존재감을 살릴 기회라 여기고 하와이의 맛을 제대로 보여준다며 뜨거운 말라사다 도넛을 식구들 입에 하나씩 물려주고 상에도 올린다.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을 엉뚱한 곳에 풀어버린 사람 때문에, 큰 손녀 화수는 몸과 마음을 다치고, 배 속 아이까지 잃고 잠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하와이의 눈 부신 햇살과 따사로움에 조금씩 문을 연다. 우연히 들어간 빵집에서 맛본 팬케이크 맛에 빠져 고민 끝에 사장님을 직접 초빙한다. 화수 동생 지수는 하와이 현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작지만 근사한 무지개를 카메라에 담아와서 프로젝터로 펼쳐놓는다.
명준과 난정의 딸인 우윤은 어릴 적 크게 아픈 뒤로 조심조심 살아왔다.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서핑이라는 큰 도전을 한다. 마지막 날에서야 아주 잘은 아니지만 파도타기에 성공한다. 우윤은 그 파도가 담긴 바닷물을 담아 올린다.
경아의 아들 규림은 다이빙을 배워 하와이 바다에 할머니 이름으로 심은 산호 증서를 올리고, 새를 사랑하는 막내 해림은 하와이 토착 새들을 못 찾은 것이 아쉬웠지만 정성껏 마련한 예쁜 새들의 깃털로 자신의 마음을 보인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화수의 남편 상헌은 푸짐한 하와이 과일로 상차림을 갈무리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내가 살아갈 세상이 아닐 테니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다음 사람이 또 나처럼 화살을 맞고 싸움에 휘말리고 끝없이 오해받을 걸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326쪽
어찌 보면 중구난방이지만, 명혜의 말대로 다채로운 상차림이었다. 10년마다 이렇게 저마다의 기억을 살려 기일을 기억하면 어떨까. 제사상에 꼭 음식을, 그것도 평소에 잘 먹지 않아 제사가 끝나면 냉장고에서 돌다가 결국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음식을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양한 추억들로 가득한 상차림이 포만감을 준다.
*작가 정세랑은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유명하다. 소설 『피프티 피플』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환경과 재난 문제를 다룬다. 구글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면 과학소설작가라고 한다. 『시선으로부터,』와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보면 그의 역사의식과 배경지식에 놀란다. 도대체 정세랑이란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다양한 시선과 관점으로 자신만의 글을 맛깔나게 펼쳐내는 정세랑의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