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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Aug 02. 2021

빨간 지갑과 청록색 스웨터

기억에 남는 선물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아서 그런지 엄청난 구두쇠였어. 그래서 돈을 정말 안 쓰셨거든. 군것질하는 것도 되게 싫어하고... 엄마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크게 선심을 쓰고 싶으면 <빵빠레>를 하나씩 사주셨어.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늬들, 빵빠레 하나 먹을래?”라고 물으면, 그날은 “오~예~!” 소리가 저절로 나는 날이었지.


   옛날에 또 어떤 일이 있었냐면 큰 이모가 초등학교 때 준비물로 찰흙을 가져가야 한다고 그랬거든? 그때 문방구에 가면 찰흙을 50원인가에 살 수 있었어. 할아버지는 동네에 널린 게 찰흙인데 그걸 돈 주고 사는 게 아깝다고 생각하셨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동네 공사장에 가서 진흙을 한 움큼 퍼다가 보낸 거야. 큰 이모는 그날 학교에서 개망신을 당했다지. 이모는 아직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하곤 해.


  엄마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선물을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어. 할아버지 성격을 아니까 뭘 사달라는 말도 잘하지 못했지.


  그런데 너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뜬금없이 지갑을 하나 사다 주신 적이 있어. 명동에서 가게 문을 닫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길에서 지갑을 팔고 있길래 하나 사 오셨다는 거야. 할아버지가 엄마에게 건넨 지갑은 투박하고 두꺼운 장지갑이었어. 촌스러운 빨간색에 번쩍번쩍 광택까지 더해져 싸구려 티가 팍팍 나는 지갑이었지. 할아버지가 엄마 취향을 알았다 한들 취향에 맞는 선물을 사 오실 리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엄마는 그 지갑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 속으로 ‘누가 줬나? 길거리에서 떨이로 파니까 싸다고 산 거 아니야? 이런 지갑을 어디다 쓰라고 샀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받기는 받았는데,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 놓고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지.




  2010년 여름이었나 봐. 휴가철을 앞두고 엄마는 너랑 아빠랑 남해로 가족여행을 가려는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아침 일찍 할머니한테  전화가 온 거야.

  “아빠가 요 며칠 배가 아프다는데 병원에 안 가시려고 하네. 네가 좀 모시고 갔다 와라….”

  엄마는 할아버지랑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서 가까운 혜민병원으로 갔어. 원무과에서 접수를 하고 할아버지는 몇 가지 검사를 받으셨어. 또 다른 검사를 위해 할아버지가 검사실로 가신 동안,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를 불렀어.


   "CT상 환자분이 간암이 확실하시고, 종양의 크기가 커서 전이가 있을 수도 있고,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고…. 어쩌고…. 저쩌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너무 갑작스러워 눈물이 왈칵 나오더라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눈물을 훔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걸어오시는 거야. 할아버지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저려오며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내 눈물에 할아버지가 놀라실까 봐 애써 참았어.


  할머니와 엄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아산병원 응급실을 찾았어. 아산 병원에서는 할아버지 간에 있는 종양이 너무 커서 지금 당장은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했지. 간은 통증에 둔한 장기라 문제가 생겨도 신호를 보내지 않는데. 그래서 종양이 커질로 커진 상태였던 거야. 그때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할아버지테 받은 그 새빨간 지갑이 생각나더라고.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는 것 같아. 별것 아닌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 말이야. 그때 엄마 마음이 딱 그랬어. 그 지갑이 할아버지의 분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혹시 지갑을 버렸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허겁지겁 여기저기를 뒤졌지. 버린 줄만 알았는데 다행히 그 지갑은 서랍 깊숙한 곳에 그대로 있더라고. 그 지갑을 꺼내 가슴 앞에 끌어안고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대성통곡을 했어. 네 할아버지는 자식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시진 못했지만, 성질 사나운 할머니가 야단을 칠 때마다 아이들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주셨어. 지금도 그러시듯 어지간해서는 화도 잘 내지 않고 늘 ‘허허허’ 웃는 너그러운 아버지였지. 할아버지가 우리를 떠날까 봐 두려워서 그렇게 울었었나 봐.


  다행히 할아버지는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의사 선생님을 만나 간 절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단다. 암의 크기가 매우 컸는데도, 다른 부위로 전이가 없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지. 지름 14cm의 어른 주먹만 한 종양 덩어리를 떼어내는 수술은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고,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은 병원 로비에 있는 의자에서 긴긴밤을 지새웠단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연세가 있으신 할아버지는 수술 후 많이 쇠약해지셨지. 통증 때문에 식사도 못 하시고 거동도 힘들어하셨어. 그렇게 날씬해진 할아버지를 엄마는 그때 처음 보았단다.


  힘들어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엄마도 할아버지께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어. 특별한 선물을 말이야. 할아버지를 위해 스웨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가을이 오고 있었거든. 엄마는 줄자를 들어 할아버지 몸의 이곳저곳을 쟀어. 가슴둘레, 어깨너비, 팔 길이, 진동 둘레, 목 너비와 앞섶의 길이까지 모두 꼼꼼히 재었단다. 엄마가 줄자를 들이댈 때마다 할아버지는 귀찮아하기도 하셨지만,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딱 맞는 ‘오로지 할아버지만을 위한 옷’을 만들고 싶었던 거야. 오랫동안 손뜨개를 취미로 했으면서 맨날 애들 옷이나 만들었지 아빠를 위해 옷 한 벌 떠드릴 생각은 못 했던 나를 자책하면서 손을 부지런히 놀렸어.


  그해 겨울, 할아버지는 엄마가 만든 옷을 입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몰라. 그 후 몇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할아버지는 엄마가 만든 청록색 꽈배기 무늬 스웨터를 즐겨 입으셨단다. 지금은 왜 입지 않으시냐고? 아~그건  아마도 할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시면서 예전의 통통한 몸매로 돌아오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 후로도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뜬금없이 선물을 갖다 주시곤 했어. 지하철에서 내려 외갓집으로 가는 중간에 우리 집이 있잖아? 할아버지는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산타처럼 깜짝 선물을 두고 가시곤 했지. 음료수, 견과류 같은 먹는 것부터 화장품과 가방 같은 것까지 말이야. 사신 것인지 얻은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지만, "엄마에겐 비밀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슬그머니 선물을 놓고 가실 때마다 엄마는 웃음이 나왔어.


  엄마도 할아버지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해야겠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그런 선물 말이야.

  우리, 오늘 저녁에 할아버지 보러 갈래? 쑥스러워도 할아버지 손도 한번 잡아보고 어깨도 주물러 드려야겠다. 할아버지가 요즘 통 운동을 안 하신다고 할머니가 걱정하시던데.. 할아버지랑 오래간만에 아차산 둘레길도 가고, 할아버지 선물로 뭐가 좋을지도 같이 생각해보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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