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샐리 존스 Jul 19. 2021

당신의 나무

잊지 못하는 노래

    어느 주말 저녁, 어쩌다 알게 된 남자 K가 그녀를 불러냈다.  종로에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혹시 시간이 되면 나오라는 것이었다. 마침 하릴없이 주말을 보내고 있던 그녀는 심심한데 시간이나 때우자라는 마음으로 한껏 단장을 하고(어찌 되었든 그녀는 20대가 아닌가!) 종로의 한 주점으로 향했다. K의 군대 동기와 후임들이 바글바글한 술집에서, 그녀가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그가 나타났다. 거기서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녀는 그 술자리에 퍽이나 실망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소지섭을 쏙 빼닮은 시원시원한 눈매에 180이 넘는 키, 넓은 어깨,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탄탄하고 두꺼운 팔. 친구들과 대화할 땐 소탈한 눈웃음을 보이다가도, 그녀의 노골적인 관심에는 까칠한 눈빛을 보내는 남자. (아마도 그는 그녀가 K와 썸 타는 사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를 어떻게든 다시 만나야 했기에, K를 구슬려 미팅을 주선했다. 그녀의 친구들이 애타게 미팅을 원하고 있다는 핑계로 만든 자리였지만, 미팅에 나올 친구들에게는 ‘노란 머리 남자는 내가 찍었으니 그런 줄 알라'라고 미리 언질을 준 터였다.


  때는 2000년 가을, 그녀의 적극적인 구애에 그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김영하와 앙코르와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영하의 단편소설 ‘당신의 나무’에 배경이 된 앙코르와트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이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사원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무의 뿌리가 기둥이 되어 받쳐 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나무의 뿌리가 사원과 불상의 사이사이로 파고들며  파괴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 답을 알기 위해 김영하의 '당신의 나무'를 읽었고, 나무뿌리가 된 그와 불상이 된 그녀가 얼기설기 얽혀 9백 년을 견디는 상상을 했다.


  2001년 2월. 그와 그녀는 여행을 떠났다.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앙코르와트는 아니었지만, 둘이 함께라면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백만 원과 배낭여행 가이드 북 하나만 달랑 들고 그들은 무작정 필리핀 마닐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와의 여행을 위해 가족 모두를 속였지만 그녀의 힘찬 발걸음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의 첫 해외여행이자, 마지막 배낭여행이 된 21일간의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출몰하는 값싼 펜션에서 잠을 잤고, 길거리에서 파는 지저분한 현지 음식을 먹었다. 덜컹거리는 낡은 버스를 타고 필리핀의 이곳저곳을 누비며 필름 카메라 속에 추억을 담았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녀가 아팠을 때 어떻게든 약을 구해다 준 그에게 고마워서 눈물 지었던 날과 낯선 해변의 방갈로에서 양주를 마시고 잔뜩 취해버린 그가 미워서 펑펑 울었던 날을, 언제든 기댈 수 있었던 그의 넓은 어깨와 호탕한 웃음을, 눈을 뜨면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모험이었던 모래알 같은 시간들을 그녀는 기억한다.


  긴 여행이 그들의 사랑을 더욱 돈독하게 한만큼, 그녀는 전보다 더 그에게 의지했고 집착했다.  그는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씨앗이었고, 그 씨앗은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해 3월, 그가 복학을 위해 강원도로 떠나자, 그녀는 그가 속한 다른 세상에 그를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흔들리기 쉬운 그녀의 마음에 그녀도 모르는  작은 동심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싶으면 경춘선 기차를 타고 춘천까지 그를 보러 갔다. 남춘천역에서 내려 20분 정도 걸으면 그의 자취방이 있는 주택가가 나왔다. 2층 계단을 통해 옥상에 올라가면, 옥상을 반쯤 갈라 만든 네 칸짜리 옥탑이 있었다. 오른쪽 세 칸은 월세방이었고, 맨 왼쪽에 있는 한 칸은 세 명의 옥탑방 주인이 함께 쓰는 공용 화장실이었다. 샌드위치 패널로 불법 증축한 비루한 옥탑에는 사람 한 명 누울 자리밖에 없는 비좁은 방과 간이 싱크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부엌이 있었다. 말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초라한 옥탑방이었지만, 그녀에겐 달빛이 쏟아지고 별들이 수없이 반짝이는 로맨틱한 공간이었다.


  그녀가 오는 날, 그는 좁은 부엌에서 삼겹살을 굽고 상추를 씻었다. 보잘것없는 앉은뱅이 상이었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추어 한상 거하게 차려 놓고 그는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와 함께 소꿉장난 하듯 밥을 먹었고 상을 치웠으며 설거지를 했다. 해가 지면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등려문의 노래를 들었다.  숨 막히게 뜨거웠던 어느 날 밤,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헤어지면,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네가 생각날 거고, 너는 내가 생각날 거야...”라고.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갔다.



 

 그들은 머지않아 헤어졌지만,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날, 그녀는 전화기 너머에서 낯선 여학생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는 주방 선반에 놓인 그릇의 덜컥거림처럼 사소한 것이었지만, 북경 나비의 날개짓처럼 여러 가지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결국엔 그녀의 신경까지 건드렸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궁극에는 엄청난 일을 초래하는 사소한 덜컥임(당신의 나무, p244). 사랑과 함께 커져만 가는 집착을 늘 두려워했던 그녀는 그에게 결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독특한 취향 덕택에, 그녀가 그와 헤어진 후 등려군의 노래를 들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 그녀는 택시 안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또 어느 날은 노래방에서 누군가가 그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날 밤 그녀에게 속삭였던 그의 말은 마법사의 풀리지 않은 주문 같아서,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등려군의 노래를 들을 때면 그를 생각하게 된다. 필리핀에서 그와 함께했던 행복한 추억을 떠올린다.


  '그때 당신은 나의 나무였고, 나는 당신의 나무였다고. 당신은 나를 지탱해주었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파괴할까 봐 겁이 났었다고... 내 생애 가장 빛났던 순간. 무모하고 철없던 스물두 살의 나에게 커다란 나무가 되어 주었던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      

 그녀는 생각한다.


[월량대표아적심]

                                                                               -등려군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你问我爱你有多深, 我爱你有几分


내 마음은 진실이에요, 내 사랑도 진실이에요 저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춰줘요

我的情也真, 我的爱也真, 月亮代表我的心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你问我爱你有多深, 我爱你有几分


내 마음은 떠나지 않아요,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요 저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춰줘요.

我的情不移, 我的爱不变, 月亮代表我的心


부드러운 입 맞춤은, 내 마음을 울리게 하고,

轻轻的一个吻, 已经打动我的心


아련한 그리움은 지금까지 당신을 그리게 하는군요.

深深的一段情, 叫我思念到如今


당신은 내게 물었죠.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냐고,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你问我爱你有多深, 我爱你有几分


머리에 그리며 바라보세요, 저 달빛이 내 마음을 이야기해줘요.

你去想一想, 你去看一看, 月亮代表我的心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꿈꾸는 소박하고 정겨운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