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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샐리 존스 Dec 19. 2021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해 그 겨울

   2002년 12월이었다.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000 열린 학교」라는 체험학습 인솔 단체에 인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000 열린 학교는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K 선생님이 대표였는데, 우리는 그를 교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타고난 달변가였던 그는 초등학생 학부모들 사이에서 재미있고 알기 쉽게 역사를 가르쳐주는 선생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그 유명세를 바탕으로 체험학습 인솔 단체를 10년째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늘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우리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열심히 국뽕을 주입하던 그가 사실은 기러기 아빠였다는 것을 당시의 학부모들이 알았더라면 굉장히 황당해했을 것이다.


    내가 인턴교사 생활을 했던 3개월은 겨울방학 시즌이었으므로 1박 2일, 2박 3일 일정의 캠프가 연달아 있었다. 나는 평일 중에서 하루를 쉬었고, 금토일에는 아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과학을 테마로 한 캠프는 대전 대덕과학단지로, 선사시대를 테마로 한 캠프는 경기도 연천으로 갔다. 백제시대 캠프는 부여와 공주로, 신라시대 캠프는 경주로 가는 식이었다.

 

    추운 겨울인데도 학부모들의 열정은 대단해서 주말이면 종각역에서 45인승 버스 6~7대가 한꺼번에 출발하곤 했다. 한 캠프 당 정규직 대장 선생님 한 명이 배정되어 일정을 진행했고 캠프를 총괄했다. 보통 아이들은 12명씩 한조가 되었는데, 한 조당 담당 교사가 1명씩 배정되었다. 담당 교사는 나와 같은 인턴 교사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이었다.

 

    대전으로 가는 과학 캠프에 따라갔을 때다. 대장 선생님은 식판을 깨끗이 비우지 못한 아이를 혼내곤 했고, 밤이 되면 아이들이 빨리 잠들길 원했다. 그땐 나도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그 선생님이 하는 방식대로, 시키는 대로 아이들을 대했다. 마치 훈련병들을 다루는 교관처럼 말이다. 그는 밤이 되면 대학생 아르바이트 선생님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밤이 새도록 술을 퍼 마셨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일정표에 따라 이동할 시간이 되어서야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나타나 숙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뻔뻔하게 웃곤 했다.

 

    연천의 선사시대 캠프는 또 어땠는가. 000 열린 학교 교장의 아버지는 연천에서 개 농장을 하고 있었다. 개 농장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교장은 그 공터에 비닐하우스로 가건물을 지어 거기서 아이들을 재웠다. 선사시대 캠프는 아이들에게 원시인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체험시켜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린 원시인 복장을 만들어 입고, 눈밭에 모닥불을 피워 찌그러진 코펠을 나뭇가지에 걸어 밥을 했다. 제대로 된 밥이 될 턱이 없었다. 아이들은 신기하고 재미있어 추운 줄도 모르는 듯했지만, 나는 손과 발이 꽁꽁 얼어 견디기 힘들었다. 화장실은 수도가 얼어 똥을 싸도 물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똥을 싸고 나면 선생님을 찾았고, 나는 바가지로 차디찬 물을 퍼부어 똥을 흘러 보냈다.

 

   2002년 1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단 3개월을 그곳에서 보냈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해 겨울은 다른 어떤 해의 겨울보다 길고 길었다.


   내가 입사한 지 3개월째 되던 날, 000 열린 학교 교장은 나를 사무실 앞 카페로 불러내더니 진지하게 물었다.  000 열린 학교의 정규직 교사로서 계속 같이 갈 생각이 있느냐고. 3개월 간 힘들고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표면적으론 별다른 불평불만도 없었던 나였기에, 그는  당연히 내가 자기와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그때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왜 이리 힘들었는지... 나는 끝까지 솔직하지 못했고 며칠을 고민해서 만들어낸 핑계는 우습게도 '남자 친구 때문'이었다.

 

“남자 친구가 운동선수라 합숙을 하는데 주말에만 집에 오거든요. 000 열린 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매주 주말 캠프 인솔을 가야 해서 남자 친구를 만날 수가 없었어요. 주말에 일을 하고 평일에 쉬어야 한다는 게 저랑은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남자 친구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20대의 어린 내가 철없고 한심하게 보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곳에서 느낀 불편함을 조리 있게 표현해낼 자신이 없었다. 나의 짧고 얕은 지식으로 교장이라는 사람의 말발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교장의 실망을 뒤로하고 000 열린 학교를 나왔다.

 



   10년 전 그러니까 2012년 어느 날. 나는 문득 000 열린 학교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잘 나갔었는데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을 해왔었는데, 오래된 신문의 홍보기사 몇 줄 외에는 어디에서도 000 열린 학교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은 듯했다. ‘역시, 망할 줄 알았어~’라고 혼잣말을 하면서도 내 청춘의 한 조각이 영영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서운하고 아쉬웠다.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지만, 20년 간 꾹꾹 눌러 담아왔던 나의 진심을 소심하게 털어놓아 본다.

 

그때 나는 당신의 위선과 무책임함에 구역질이 났었다고, 데모하다 전과자 된 것이 마치 애국지사의 훈장인양 떠벌리고, 직원들에게 무조건 노 00을 찍어야 한다고 강요하던 당신의 모습이 진저리 나게 싫었다고. 체험학습 한답시고 그 많은 어린이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사고 한번 안 난 걸 천운이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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