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라면 엄마도 자란다.
adhd 아이를 키운다는 건.
첫째 아이는 까다롭고 예민한 기질을 가진 아이였다. 임신 기간에도 몸이 안 좋아서 힘들었는데, 태어난 아이는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잘 자지도 먹지도 않았으며 너무 예민했고 밤새 울어 댔다.
나는 아기를 낳으면 저절로 엄마가 되듯이,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도 저절로 생기는 줄 만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큰 아이와 나의 관계는 썩 좋아지지가 않았다. 나는 그 애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했던 것 같다.
큰 아이가 4살 때 둘째가 태어났다. 신생아를 돌보느라 나는 더 예민해졌고 큰 아이의 작은 잘못에도 크게 화를 내곤 했다. 그때 나는 내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이에게 화를 내고 나면 죄책감에 힘들어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화를 내고... 매일매일이 악순환이었다.
큰 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무섭게도 나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친구의 작은 잘못에도 지나치게 화를 내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등 자기감정을 전혀 다스릴 줄 몰랐다.
'얘가 왜 이럴까? 얘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왜 이런 아이가 되었을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내가 내린 답은 항상 "나 때문에"였다. 내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많이 울었다.
그때 만났던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아이의 기질을 타고 나는 겁니다. 몇십 년을 수행한 스님도 예상치 못한 어떤 상황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욱 해버리거든요. 기질은 쉽게 바꿀 수가 없어요. 다만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이의 기질을 잘 알아서 장점은 살릴 수 있게 도와주고, 단점은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죄책감의 수렁에 빠져있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날 이후 아이와 나는 잘못된 애착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상담치료를 시작했다.
둘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아팠다. 그 때문인지 항상 안쓰럽고 마음이 쓰였다. 순하고 느린 둘째는 정상 발달을 겨우 겨우 쫓아가는 아이였다. '큰 병원에 가봐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면 그 순간 신기하게도 발달 과업을 완수해내고 마는, 느리지만 굳 센 그런 아이.
순하고 느린 아이도 ADHD 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아이를 키우며 알았다.
ADHD는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말하는데, '과잉행동이 우세한 아이'는 행동이 빠르고 말도 많으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반면, '주의력 결핍이 우세한 아이'는 얌전하고 조용하지만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해 뭐든지 잘 잊어버리고, 정리정돈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또 울었다. 나에게 왜 이런 큰 어려움을 지우시는지 원망스럽기도 했다. 큰 아이 때문에 마음고생을 톡톡히 하기도 했고,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마음에 많은 여유가 생겼음에도 둘째 아이마저 ADHD라는 진단을 받자 내 마음은 또 무너졌다.
하지만 아이를 원망하던 철 없던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졌다가 일어나면서 더 단단해졌다.
나는 큰 아들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엄마의 힘듦이 아이에게 아픈 기억이 되지 않도록, 엄마의 불안이 아이에게 두려움이 되지 않도록 나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나는 둘째 아들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이 외로운 아이는 내가 주는 사랑으로 자존감을 키우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 나갈 힘을 얻을 것이다. 늘 내가 주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내게 주는 둘째 아들.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나눌수록 울창해지는 숲과 같았다.
나는 이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 잘 노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친구들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