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생각하자, 제발
어느새 내일이 대망의 이삿날이다. 계획한 대로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 중임에도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지….
방은 지난 며칠 사이 더욱 난장판이 됐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저거는 이 박스에 넣고 저건 따로 묶어서 깨지지 않게 담요에 싸서 가져가고' 등 계획을 세웠건만 물건을 박스에 넣어보려 했더니 너무 커 박스에 들어가지 않거나 생각보다 차가 작고 짐이 많아 최악의 경우 두 번에 나눠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는 일들이 생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하면 되는 건데 왜 나는 이런 자잘한 예기치 못한 것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정말 화난다.
며칠째 이삿날의 날씨와 강우량을 확인하고, 매트리스를 가져가기로 한 업체에도 혹시 예약에 착오가 있었을까, 예약을 확인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냈다. 어쩌면 나는 OCD(강박장애)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OCD는 같은 자리, 컵, 색등 무언가를 고집하는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OCD의 범위는 내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강박장애 정도의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여타 남에 비해서 불안감이 높은 건 사실인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첫 불안은 7살, 인도네시아에 살 때 복도 벽의 금을 본 순간이다. 마침 지진대와 인도네시아가 불의 고리라는 지진대에 위치했다는 것을 배운 나는 어쩌면 벽에 난 금이 지진의 전조 거나 이미 진행 중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키웠다. 나는 며칠 동안이나 지진이 나는 악몽을 꿨다. 나를 이렇게 스트레스받게 하는 원인인 동시에 나를 움직이게 하는, 나의 가장 큰 원동력 또한 불안감이다. 어쩌면 내가 경제적 자유에 집착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이 직장, 이 나라가 언제까지 나에게 안정감을 제공할지도 모르겠고, 나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스스로밖에 없다는 생각이 독립 후 더더욱 강해진다.
그렇다고 SO (significant other)나 친구, 가족과 이 부담, 불안감을 나눠갖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혼자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유와 만족감을 깨달았고, 또 나의 성격상 둘이 되면 내가 두 명 어치 불안을 떠 앉으면 앉지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ㅎ. 20대 중반, 내 삶을 내가 계획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아무도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여태까지의 어린 시절이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모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불안감을 잠재울 방법을 안다. 해치워 버리면 된다.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치운 경험치가 축적되면 언젠가 이런 쪼렙 이벤트 정도론 눈썹 하나 까딱 안 하는 만렙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쪼렙 시기가 즐겁다고는 절대 말 못 하지만, 멋진 어른이 될 미래의 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견뎌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