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남긴 평화의 자리, 에이브러햄 평원
편한 운동화, 안에는 반팔티, 긴팔 겉옷, 모자 달린 방수 점퍼, 우산, 물병, 초콜릿이나 사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넣을 수 있는 가벼운 배낭. 날씨 변화가 많고, 계단이나 언덕을 올라가야 해서 많이 걸어야 하는 퀘벡을 여행할 때 필요한 목록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오전에 조금 흐리고 해가 나기 시작해서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역시 드라마 도깨비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유명해진 장소이지만 원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에이브러햄 평원에 갔다.
어찌하다 보니 사람들이 많이 가는 동선이 아닌, 반대방향부터 시작해서 느긋하고 조용하게 공원을 돌고 마지막에 도깨비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공원이 공사 중 이어서 (여행 성수기가 아니어서인지 여기저기 공사 중인 곳이 많다) 아쉬웠지만 전망은 훌륭했다. 1759년 이곳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가 있었던 장소로 에이브러햄 마틴이라는 농민 소유의 땅이었기 때문에 전투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한 바퀴를 돌다 보면 곳곳에 전투의 유물을 발견할 수 있고 박물관도 있어서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가볼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전쟁 중에 전사했고 영국의 승리로 땅을 빼앗기는 아픔의 역사가 되었지만 프랑스에서 건너온 유민들이 살아온 터전을 마련하게 되어 프랑스 문화와 전통을 이어올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또한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이 미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요새를 쌓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북미에 유일한 성곽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이 드넓은 언덕을 걷는 것만으로 평화롭게 느껴진다.
지나가는 길에 봐두었던 일식집에 가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현지인이 만드는 초밥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예상을 깨고 맛있었다. 여행 중에 두 끼를 한 끼로 해결하고 있어서 또 한 번의 생존 본능을 발휘, 평소보다 2배를 먹었다. 먹고자 하니까 들어가더라, 그러니까 살고자 하면 또 살아지게 되는 게 인생인 것이다.
무심코 사진을 찍어도 풍경 화면이 되고, 골목골목 모르는 길이 없을 정도로 몇 번을 지나갔던 거리인데도 지루하지 않다. 시티에 있는 성당 (Notre-Dame de Québec Basilica-Cathedral) 앞도 공사 중이라서 정신없기는 하지만, 그 앞에 사계절 내내 오픈하는 크리스마스 상점과 기념품 가게도 들려보았다.
배를 타고 Levis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좋다. 나는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처럼 더 이상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배 안에 앉아 책을 읽는다.
절벽 사이에 세워둔 것 같은 빨간색 계단을 등반하듯 올라가 지도를 보지 않고 집으로 간다. 오늘도 한적한 거리에 핀 꽃들은 조용히,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