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남들은 결혼을 하고 안정된 삶을 꿈꾸기도 하는 서른 살, 나는 돌연 한국을 떠났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아직은 다른 인생에 도전해 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이십 대 유학생들 사이에서 더딘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5년 뒤 한국에 귀국했지만 결혼 후 다시 한국을 떠났고 마흔 넘어서 한 번도 일해보지 않은 로펌에 들어갔다. 두렵지 않았다. 배우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십이 되어 또다시 전혀 일해본 적이 없는 분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배우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이라고,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어떤 사람에게도 늦은 ‘시작’은 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내가 한국에서부터 수많은 다른 직종에 종사하며 옮기는 것을 겁내지 않았던 것은 도전을 좋아하는 내 성향 탓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오십의 시작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일단 굳어버린 내 머릿속에 새 정보를 집어넣는다는 것 자체가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어떤 자리에 도달하고 싶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 같은 것은 없어진 지 오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십 대의 나는 성공하고 싶었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리고 인생의 배에서 몇 번이나 폭풍우를 맞이하고 나면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할 줄 안다면 인생은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제는 큰 욕심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저녁을 먹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여유를 꿈꾸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삶의 무게는 도저히 빠지지 않을 것 같은 늘어진 뱃살처럼 버거워진다.
지난번 글에 언급했던 A는 팀장으로부터 들은 인생의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30분 미팅 뒤 자괴감에 빠졌다. 이번에 대학을 들어간 큰 딸이 사귀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계획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본다. 직장에 적응을 못하고 옮겨 다니는 것이 아내에게도 못내 미안하다. 고등학생인 둘째도 있고 아직 갈 길은 먼데 그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좁은 골목길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중년은 삶의 절정이자 한계라고 표현하는 어떤 교수의 글을 본 적이 있다. 평가받는 시기, 결과물이 나타나는 시기, 안정기에 접어들고 노후를 편하게 보내기 위해 준비라는 시기. 그러나 현실은,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2-30대 MZ 세대와 나이 운운하며 라떼 타령하는 꼰대 사이에 껴서 여전히 이리저리 치이며 타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백세 인생, 절반의 나이테 앞에서 지나온 날들보다 맞이할 날들이 두려운, 목이 꺾여 피지 못한 꽃처럼 메마른 오십 대의 한 주가, 속도 모른 체 찬란한 파란 하늘과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