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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May 23. 2021

하드코어 취미의 서막

"텐트, 침낭, 매트. 이 세 개만 있으면 돼요."


“텐트, 침낭, 매트. 딱 이 세 개만 있으면 돼요.”


돌이켜보면 진실이기도 거짓이기도 한, 이 한마디가 새로운 취미의 시작이었다. 그 정체는 바로 ‘백패킹’. 우리말로 ‘등짐 여행’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도 귀엽지 않은, 하드코어 취미의 서막이 바로 그때 열린 것이다.


2020년 늦여름쯤이었나, 주변에서 하나둘 백패킹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등산을 좋아하여 일주일에 한 번은 산에 오르는 나지만, 그때까지는 백패킹을 시도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물론,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산으로 강으로 향하는 설렘과, ‘오늘의 박지’라며 텐트가 알록달록 펼쳐진 모습,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가 담긴 사진은 이따금 눈을 사로잡긴 했다.


그러던 와중 귀에 날아든 한마디는 호기심의 씨앗이 되었다. 얼마 뒤 등산 메이트인 언니가 백패킹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씨앗은 파릇파릇한 싹을 틔웠다.


근데 생각해보니 백패킹이라는 거, 나도 해본 적이 있었다. 낳으시고 기르신 등산 부부와 함께 가족 비박* 산행을 몇 차례 한 것이 기억난 것이다. 비록 텐트도 침낭도 멘 적 없는 무임승차자였지만.

* 비박(Biwak)은 놀랍게도 한자어가 아닌 독일어로, 원래는 ‘등산 중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밤을 지새우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릴 적 아빠는 지금의 백패킹을 비박 산행이라 불렀다.


곧장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 백패킹 해보려고요”


아빠는 갑작스러운 딸의 고백에 잠시 당황하는 듯하다가, 이내 나보다 더 신이 났다. 그러면서 장비를 하나씩 사고 나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 그때가 제일 재미있는 거라고 강조하셨다. 곧장 이런저런 장비도 박스에 담아 택배로 보내주셨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이끌리듯 종로 5가** 로 향했다.

** 종로 5가 ‘누군가 백패킹의 시작을 묻거든 고개를 들어 종로 5가를 바라보라.’라는 명언이 있을 정도로 백패커를 위한 각종 장비를 판매하는 상점이 모여있다. 물론 위 명언은 내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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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멋진 섬이나, 강가에서도 백패킹을 많이 하지만, 나에게 백패킹은 등산의 새로운 갈래로서의 시도였다. 산에 올라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내는 경험을 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경험해본 백패킹은 등산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장르였다.


백패킹은 해가 지고 뜨는 시간 동안 잘 집과, 먹을 음식, 입을 옷, 그러니까 의식주를 내 등에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 목적지에 오르는 일이었다. 15kg에 달하는 짐을 이고 지고, 두 다리와 양팔로 땅을 밀어내며 산에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출발 전에 찍는 그날의 짐. 물론 찍고나서 또 바뀐다.


그런데, 산의 정상이나 중턱에서 밤을 보내는 일은 엄청 힘들긴 해도 엄청 엄청 즐거운 일이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억새가 가득한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지는 노을과 빼곡한 별을 바라보며 얼마든 ‘멍’ 때릴 수 있었고, 함께한 사람들과 간단하고도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크고 작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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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초보 백패커의 백패킹 예찬은 과거형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기롭게 장비를 갖춘 후 두 차례의 백패킹을 마치고 차디찬 겨울이 찾아와 버린 것이다. 동계 백패킹이란 또 다른 장르이므로, 나의 새로운 취미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의 취미’라고 명확하게 울타리를 만드는 까닭은, 앞선 두 번의 경험을 통해 백패킹의 매력을 확신했기 때문이고, 아직 떠날 수 있는 날과 아름다운 장소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오늘의 집을 직접 메고 산에 오른다는 사실이 백패킹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발품 팔며 장비를 갖춰가는 것이나, 아름다운 명소에서 지고 뜨는 해를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나, 좋은 사람들과 마음속 이야기를 편안히 나눌 수 있는 것이나, 빼곡한 별 아래 넋을 놓을 수 있는 것 같은 모든 순간순간이 가장 큰 매력의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다. 아, 수많은 고생스러운 기억들이 집에 도착해서 낮잠 한 번 자고 나면 잊히는 것도.

반짝이는 별이 가득했던 명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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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자면 백패킹을 할 때는 15kg을 넘나드는 짐의 무게보다, 자연에 대한 고민의 무게가 더욱더 무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뻔하지만 중요하니 언급하자면, 백패킹은 자연이 좋아서 자연의 품에 파고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자연을 우선시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예를 들어, 산에서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하므로 비화식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민하여 챙겨야 하고, 쓰레기를 되가져가는 것은 두말할 것 없으며, 야영이 금지된 공간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봄이 찾아왔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나의 텐트는 오랜 시간 폴대를 펼쳐 보이지 못했고, 거금 들여 산 침낭은 창고 한구석에 농구공만 한 크기로 작아져 부풀어 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며칠 전, 함께 백패킹을 시작한 언니는 장비를 팔겠다고 선언해버렸으니, 올해는 오래된 장비를 가진 우리 집 등산 부부에게 백패킹을 하자고 졸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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