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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Jul 25. 2021

퇴근 후 산에 오르면, 반짝이는 도시가 보인다

때때로 도시를 두 발아래

2019년 6월 29일.      

그날을 세 글자로 요약하면 아마 ‘배신감’ 정도가 될 것이다. “아, 세상 사람들 나 빼놓고 이렇게 좋은 것을 보고 있었다니!”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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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복이 들어 있는 종이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설레는 일이었다. 퇴근 후의 시간을 떠올리면, 09시부터 18시까지는 조금 더 수월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하나만 바라면 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야근하는 일만 생기지 않게 해 주세요.’     


여섯 시, 퇴근과 동시에 짐을 챙겨 목적지로 향할 땐 늦거나 헤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소 조급해졌다. 근데, 지도 앱을 켜 길을 몇 번이나 확인하는 그 순간이 또 설렜다. 역에 도착한 후, 출근 복장에서 운동복으로, 낑낑대며 옷을 갈아입고서 다시금 거울을 마주하면 또 한 번 설렜다. 새로운 오늘을 맞이할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조심스레 꺼내어보자면, 내 좌우명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이다. 물론 ‘누가 뭐라건 내 맘대로 살겠다!’라는 건 아니고,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살자는 의미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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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태어나 처음으로 야등을 하는 날이었다. ‘야등’은 야간 등산의 줄임말인데. 달밤의 (조금 빡센) 체조,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부모님을 따라 일출 산행을 할 때, 헤드 랜턴을 켜고 깜깜한 산에 올라본 적은 있으나, 오롯이 밤의 풍경을 마주하기 위해 산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내가 활동하던 등산 모임은 일주일에 한두 차례의 평일 야등과 한두 차례의 주말 등산이 있었기 때문에, 야등 도전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첫 목적지는 관악산이었다. 정상까지 오르는 것은 아니고, 사당역에서 출발해 두 개의 봉우리에 오르는 것으로,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코스였다(대부분 서울의 야등 코스는 야경이 아름답다).      


해 질 무렵의 등산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데, 랜턴의 불빛을 따라 내 눈앞에 놓인 길만 보고 가기 때문에 힘들 겨를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개운한 땀을 쏟아내며 앞만 보고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을 만났다. 빼곡히 펼쳐진 도시의 불빛은 일명 ‘풍경 멀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산에서 바라본 야경은 날이 어두워질수록 더욱 진하게 반짝였다. 철제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한걸음 디디고 경치 한 번 보고’를 반복해야 했다. 경치를 보느라 넋을 놓다가 계단에서 발이라도 헛디뎠다간 큰일이니 말이다.     

관악산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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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 구룡산, 우면산, 인왕산, 용마산, 아차산, 불암산, 청계산 …….     


그날 이후 도시의 야경을 볼 수 있는 산을 숱하게 올랐다. 야등으로 유명한 코스는 대부분 어렵지 않고, 아름다운 야경을 선사하기 때문에 매번 선물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넓은 바위가 있는 곳에서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멍-하게 불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쉼 없이 광고가 재생되는 전광판도, 바닷가의 등대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빨간 불빛을 내뿜는 고층빌딩도, 바쁘게 움직이는 차의 불빛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낮 동안 무겁고 무섭게 나를 내려다보던 도시의 빌딩들이 내 발아래 있는 기분은 썩 괜찮아서, 중독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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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긴 여름은 야등의 적기다. 퇴근 후 어둠이 내리기 전에 안전하게 산에 오를 수 있고, 노을이 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볼 수 있고, 바빴던 일상의 열기를 지는 해와 함께 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야등은 안전상의 문제로 혼자 가서는 안 되는데, 고거 하나가 아쉽다.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산행이니 더 좋은 것일지도?     



ps. 야등은 꼭! 밤 산길에 익숙한 사람과 동행하세요! 코로나 4단계가 끝나면 서너 명 함께 가는 것이 좋아요.


인왕산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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