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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Aug 09. 2021

어차피 서울에 나를 위해 지어진 집은 없다

현재까지는 마지막 이사, 광진구 1.5룸 이야기

때때로 손가락을 접어본다.

열 손가락을 다 접고 다시 몇 개를 펼쳐야 끝이 난다.


"와, 벌써 14년째라니."


저 멀리 남쪽 섬에서 나고 자랐는데, 이제 몇 년만 더 보내고 나면 내 고향 거제에서 산 시간보다 이곳 서울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진다. 생각해보면 가족의 품에서 보낸 20년이 뜨내기 삶을 버텨낼 힘을 줬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20년을 채워 살고 난 후엔 어떤 시간이 나에게 버텨낼 힘으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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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 후 급하게 일곱 번째 이사를 마쳤다. 정신 차리니 일면식도 없는 동네에 '저 여기서 좀 살아보겠습니다.' 하며 뿅!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성수동 회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집을 구하러 다녔다. 2주 동안 못 해도 열 군데가 넘는 부동산을 드나들었고, 보러 다닌 집의 수는 셀 수도 없다. 가계약을 마치고 이사 날짜를 조율하다가 어긋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방을 구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구파발과 비교했을 때, 비슷한 크기의 전세방을 얻기 위해서는 몇천만 원을 얹어야 했다. 그만큼의 대출을 더 받아야 했다는 의미다. 남의 돈을 빌리는 건 어찌나 어려운 일인지, 첫 월급을 받는 날 앞뒤로 점심시간마다 따릉이를 타고 은행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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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 집을 만났다. 딱히 넓지도 않고, 창문이 커다랗지도 않고, 채광이 좋지도 않았으나, 이상하게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여러 생활공간을 전전하며 우선순위는 계속 바뀌어 왔는데, 이 집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공간의 구분’이었다. 투룸까진 바라지 않았고, 1.5룸이면 타협할만했다.


그간 서울 뜨내기로 살며 체득한 몇 가지 문장이 있는데, '백 퍼센트 만족할 집은 없다'와 '집도 인연이 있다'가 대표적이다. 어차피 이 도시에서 나를 위해 지어지는 집은 없다. 그저 수중에 있는 돈과 은행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을 합한 한도 내에서 썩 나쁘지 않은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 룰이었고, 집을 구할 때 문을 열어주는 집 중에 살 집을 골라야 하는 게 이치였다.


며칠 뒤, 계약을 위해 부동산으로 향하는데, 참 낯설었지만 사람 냄새가 곳곳에 배어있는 동네라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 부동산이 재미있었다. 오래된 부동산에 들어서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 사장님이 집주인 할머니와 오랜 안부를 나누고 계셨다. '누구네 아들이 언제 장가를 갔고 누구네 손주가 어디가 아프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내가 방을 계약하러 온 게 맞나, 이들의 반가운 만남을 방해하는 훼방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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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람 냄새 폴폴 풍기는 이곳은 광진구다. 어느새 광진구민이 된 지도 1년이 넘었다. 푸근하긴 하지만 딱히 매력이 없을 것 같던 이 동네에도 구석구석 숨은 매력이 넘쳤다.


집에서는 창문에 온몸을 붙여야만 손바닥만 한 틈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집을 나서면 십오 분 만에 한강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고, 반대편으로 십오 분을 가면 어린이대공원을 산책할 수 있다. 버스를 잠깐만 타면 용마산과 아차산을 걸을 수 있기도 하다.


쿠팡이츠나 배달의민족을 통해서는 성수동 핫플의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맛있고 정감 가는 동네 가게들이 골목골목 자리해있다.


여전히 빛이 잘 들지 않고 바깥을 내다볼 수 없는 집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그 덕분에 해 질 무렵에는 달처럼 동그란 조명 두 개를 거실 양쪽 끝에 켜 두고 와인을 마시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다.



좌 어린이대공원 우 한강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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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14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이제 좀 서울내기처럼 굴어도 되는 것 아닐까 했는데, ‘-내기’가 되려면 그곳에서 나고 자라야 한단다. 애초에 될 수 없는 것을 기대했다니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평생 뜨내기로 살아가는 삶도 꽤 괜찮을 것 같단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의 이사 연대기>는 동작구 상도동에서 시작해 서울을 시계방향으로 돌고는 광진구에서 일단 끝이 났다. 그리고, 아마 다음 이사는 올가을이나 겨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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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글을 써보니, 결국은 언젠가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 감정과 생각을 다시금 복기하고 토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감은 결국 나의 과거가 되니, 오늘의 일상에 크고 작은 변주를 시도해봐야지 하는 다짐도 하게 된다.


뜨내기로 20년을 채우려면 6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또 몇 개의 동네를 스쳐 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차곡차곡 나를 쌓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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