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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란 Jul 15. 2022

심심과 성실

노량진 공무원 동영상 강의 촬영 아르바이트

4학년 1학기를 마친 여름 방학, 대학 생활을 한 학기 남겨두고 1년간의 휴학을 계획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유럽 여행’이었다.


혼자서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알던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경험이 절실했다. ‘대학 때 유럽 여행은 빚을 내서라도 가는 것’이라던 사람들의 조언도 마음을 움직였고, 여러모로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던 스스로에게 무언가를 해내는 경험이 커다란 힘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꽤나 잘한 일이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스물셋, 홀로 떠난 유럽여행 이야기는 다음에 듣기로 하자. 이 글에서는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 이야기를 하고자 맘먹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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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내 힘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러나 수능을 치른 후 짧게 맛본 백화점 아르바이트 이후 자신감을 영 잃었고 막연한 두려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미 휴학계를 내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밤낮으로 ‘알바몬’ 같은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PC방 아르바이트는 어떨까? 담배 냄새는 싫은데. 학교 앞 뚜레쥬르도 알바를 구하네. 근데 7시 출근은 좀 무리일 것 같아.’


한참의 고민 끝에, 떨리는 마음으로 한 학원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고객을 상대하는 일은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으니, 사람보다는 기계를 상대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 방송 분야를 꿈꾸기도 했고, 영상을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촬영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이 일이라면 해볼 만하다 싶었다. 간단한 면접 후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노량진 공무원의 명가(였으나 불명예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이그잼 학원에서 강의 촬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011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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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아주 적성에 맞았다.


많게는 이백 명에 이르는 군중 속에 있었지만 아무도 촬영 아르바이트생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강의 촬영은 엄청난 영상미나 기술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빨간 점이 그려진 [REC] 버튼만 제때 누르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땐 웨이스트 샷(Waist shot)으로, 판서를 하실 땐 글씨를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잡고선 잘 따라가면 됐다.


메모리카드 대신 자그마한 테이프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녹화 테이프가 다 되어갈 때는 손을 들어 선생님과 사인을 맞추고 테이프를 갈아 끼워야 했는데, 새 테이프를 장착한 후 다시 [REC] 버튼을 누르고 오케이 사인을 날리는 것이 가장 떨리는 순간이었다.


국어와 영어 같은 기본 과목에서 시작해 행정학, 형사법, 공인중개사 강의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업을 오가며 촬영했다. 최진우 선생님의 국사 수업은 너무 흥미로와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집중하며 들었고, (선생님이 너무 멋있기도 했다.) 범죄학 수업은 잔인한 사건 현장 사진과 범죄자의 이야기가 무서워 집중하지 않으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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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과 수업 사이 공백이 생길 때면 사무실에 자잘한 손길이 필요한 일을 하나둘 해치웠다. 사무실 한편에 끝없이 쌓여있는 일은 녹화 테이프를 되감는 일이었다. 수업을 녹화한 테이프는 컴퓨터 파일로 변환하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한 차례 재활용했다. 쓴 테이프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사용한 테이프를 처음으로 감아 놓는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그 일을 좋아했다. 성격이 활발하여 말이 끊이지 않는 성격도 아니고, 예나 지나 가만히 있는 걸 못하는 편이라 테이프를 되감고 테이프 케이스를 정리하는 일은 시간을 보내기에 좋았다.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졌다.


그저 심심풀이를 위해 하는 일이었는데, 팀장님과 직원분들은 나를 성실하다고 평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나 좋자고 하는 일이었으니, 딱히 요령을 피우거나 대충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첫 아르바이트에서 나의 부족함을 깨달았다면,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소심한 나에게도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심심함이 만들어 준 성실함을 가진 사람으로 한 뼘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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