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집 구하기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모든 과정은 쉽지 않았으니까. 그 쉽지 않은 일 중, 가장 큰 박탈감을 느꼈던 경험으로는 단연 집을 구하러 다녔던 시간이 가장 먼저 떠오르니까.
열아홉에 상경하며 시작했던 하숙 생활부터 손을 꼽아보자면, 어느새 여덟 번째 이사였다. 지난 일곱 번의 이사를 하는 사이 나는 학생에서 직장인이 되었고, 거제시민에서 서울시민이 되었으며, 이방인에서 생활인이 되었다.
서울 생활에는 익숙해졌지만, 여덟 번째 이사는 새로운 영역의 것이었다. 새롭게 꾸리게 될 내 가족과 함께 살 집을 구해야 했으니까. 그러니까, 여덟 번째 이사는 ‘신혼집’을 구하는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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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품을 팔기 시작했던 건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이었던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도 있었고, 무더운 공기와 뜨거운 볕을 피해 다녔던 날도 있었으니까.
집을 구할 때는 ‘이런 집에 살고 싶다’ 하는 우선순위보다, ‘이건 절대 안 돼’ 싶은 것을 소거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전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나의 경우는 반대에 가까웠다. ‘이것만은 꼭’ 하는 조건을 한두 가지만 정하고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살 집을 알아보는 것.
고시원에 살던 때에는 ‘창문이 밖으로 나 있는 집이면 좋겠다’가, 반지하에 살던 때는 ‘밖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집이 좋겠다.’가, 누군가 집에 침입했을 때는 ‘문 앞에 CCTV가 있는 집으로 가야겠다.’가, 오랜 원룸 생활을 한 이후에는 ‘눈을 떴을 때 집의 네 모서리가 다 보이는 집 말고, 방과 거실이 나뉜 집으로 가자’가 첫 번째 조건이었다.
신혼집을 구할 때는 ‘창밖 풍경이 있는 집’이라는 조건이 가장 중요했다. 창문이 커다랗게 있어도 맞은편을 신경 쓰느라 내내 블라인드를 쳐야 하는 집 말고, 근처 상가에서 틈만 나면 올라오는 담배 연기에 창문을 열기 어려운 집 말고, 창문 앞에 바로 옆 건물이 붙어 있어 하늘을 보려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야 하는 집 말고. 창밖 풍경이랄 것이 있고, 그 풍경을 맘 편히 바라볼 수 있는 집이었으면 했다.
같이 사실 분은 처음엔 조건이 없는 듯했으나, 빌라 몇 곳을 둘러본 뒤 명확해졌다. 그는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했다. 자취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던 그는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고,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아파트라는 조건이 등장하고 나니, 우리가 가진 예산에서 매매할 수 있는 집은 없었고, 그렇게 신혼집은 전세로 구하기로 했다.
제아무리 전세라 해도, 집값이 천정부지인 상황에서 여러 조건을 만족하는 아파트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약 한 달 반가량 곳곳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사는 사람들의 개성만큼이나 생활감이 강한 집을 약 열 네댓 군데 둘러본 것 같다. 그중 기억에 남는 몇 곳은 다음과 같다.
1.
처음 방문한 곳은 아파트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빌라에 가까운 건물이었다. 꼭대기 층 집이었는데,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았더니 집주인이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허허 헛웃음이 나 실실 웃고 있었더니, 공인중개사 선생님께서 등본 속 주소가 익숙하지 않냐 물으셨다. 검색해보니 지도가 가리키는 네모진 건물은 나도 참으로 좋아하는, 아주 유명한 음식점이었다. “그 집 막내딸 명의로 되어있는 집인데, 지금은 둘째 딸이 전세로 들어와 살고 있을 거야 아마.”라는 말도 이어졌다. 위치는 너무 좋았지만, 창밖 풍경이 없었고, 처음 둘러본 집을 덜컥 계약하는 것은 아니다 싶어 포기했다.
2.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관악산 자락에 붙어 있는 아파트였다. 대규모 단지에 깔끔하기도 하고, 비교적 신축인 데다 창밖으로는 초록 초록 나무가 가득했다. 가격도 예산안에 들어왔고, 집의 구조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하고 부동산 문을 열고 나와 지하철역까지 가는 버스를 탔다. 회사에서 조퇴하고 설레는 맘으로 올 땐 몰랐는데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그 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털털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을 내려간 후 좁은 시장길을 한동안 달리다가, 큰길에 접어들어서는 걷는 속도로 나아갔다. 아파트에서 지하철역까지 약 40분의 시간이 걸렸고 분명 앉아있었음에도 피곤이 몰려왔다. 연계되는 지하철이라도 한적하면 좋았을 테지만, 닿은 곳은 신림역. 그곳은 언제나 혼잡한 동네였으며, 우리의 직장은 거기서 2호선을 타고 2~30분은 더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출퇴근에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릴 것 같아.’
3.
언젠가 한 번은 한강이 도보 5분 거리인 집이 매물로 나와 찾아갔다. 예산을 살짝 오버하기는 했지만, 대출을 좀 더 받으면 될 것 같았다. 그래, 우리가 앞으로 한강뷰 아파트에서 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신혼의 용감함으로 한번 질러 보는 것도? 하는 말도 안 되고 겁도 없는 상상을 하며 부동산으로 향했다. 한강을 보기 위해서는 창밖으로 고개를 쭈욱 내밀어야 하는 집이었으나, 그래도 좋았다. 매일 밤 한강 산책을 할 수도 있고 맘만 먹으면 회사에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등기부등본에 근저당이 잡혀있었는데, 집주인이 말소해줄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지금은 집주인이 외국에 나가 있어서 계약하게 되면 배우자와 절차를 진행한다고 했다. 영상 통화라도 가능하냐 물었더니 곤란하다고 했다. 두 번 고민할 것 없이 그 집을 포기했다. 그 집은 최근까지도 매물로 남아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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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무더위가 한풀 꺾인 가을의 초입이었다. 두 사람이 짧지 않은 시간 사회생활을 하며 모은 돈을 전부 쏟아부어도 모자라 은행에 손을 벌려야 하는 일이었으니 대충 결정할 수는 없었다. 사실, 성격이 급하고 집에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그냥 이 지겹고 어려운 일을 끝내고 싶었다. 그냥 적당히 괜찮아 보이면 계약해버리자고 말하고 싶었다. ‘뭐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나를 다독였다. 분명히 우리가 본 것보다는 괜찮은 집이 있을 거라고,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했다.
그러다, 지금 집을 만났다. 사진을 보고 ‘이거 진짜예요?’ 하고 물어보았을 만큼 거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마음에 들었고, 남편이 원하는 튼튼한 아파트였다. 지어진 지는 꽤 되었으나 깔끔했고, 북서향이긴 했으나 실내는 밝았다. 예산은 조금 초과했지만 감수할만했다. 살다 보니 몇 가지 놓친 부분이 있기는 했고, 주변 상권이 활발한 편은 아니지만 아직 큰 불편 없이 새로운 동네와 친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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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품을 파는 일은 몸도 마음도 지치고 힘들다. 그러나 어떤 결정에 앞서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집을 구하는 일 말고도, 발품을 팔며 들여다보고 듣고 느끼는 일은 중요하다.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은 무엇일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지 알기 위해서는 발품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해보지 않고 알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발품을 파는 수고는 사라지지 않고 인생의 궤적이 되어줄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