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홀쭉해진 통장잔고를 확인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뭘 하고 싶은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을 때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죠. 자존감이고 자신감이고 전부 다 바닥을 찍었었죠. 기왕 이렇게 한심해진 거 이유나 알아보자 싶었습니다.
나는 어쩌다 하고픈 일조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
그렇게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 있었다면 엄청난 끈기를 부려봤을 텐데 그래 본 적은 딱히 없었으니까요. 피아노는 체르니 40을 배우다 그만뒀고, 수영은 접영을 막 배울 때 그만뒀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로 전교 1등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반 1등도 그렇고요. 아, 저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왠지 억울합니다. 그래도 체르니 30까지는 배웠고, 자유영, 배영, 평영도 잘하고, 1등은 아니지만, 반에서 3등은 해봤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들도 다녀봤고, 승진도 빨리했으니까 말이죠. “내가 왕년에….”라고 자랑할 만한 것은 없지만, 적어도 넋 놓고 살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단점이 많은 사람인 건 인정합니다. 단점 경연대회에 나가면 적어도 은상 정도는 탈 만한 부족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 설마 저한테만 문제가 있을까 싶어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충분히.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 목차 중
학습된 무기력 때문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저는 자퇴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공부로 성공할 것 같지는 않고 차라리 빨리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 싶었으니까요. 어중간한 성적으로, 어중간한 직장 가서, 어중간하게 자리 차지하고 있다가 어중간한 나이에 명예퇴직할 게 뻔했으니까요. 꿈 많아야 할 고등학생에게 어울리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 눈에 이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반장이던 제가 상담 중에 “학교 그만두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미쳤어?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래!” 어르고 달래고, 혼내고. 부모님도 학교에 오셨습니다. 아주 난리가 났고 결국 학교에 남기로 했죠. 지겹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정말 지긋지긋하게 공부를 이어갔습니다.
수능을 보자마자 교과서를 깡그리 모아서 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수능 공부 안 한다는 생각으로 말이죠. 아뿔싸, 합격을 해버렸고 공부는 끝날 기미가 안보였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한건 아닙니다. 장학금도 여러 번 받았으니까요. 생각해보면 그때 나왔어야 했는데. "미쳤어? 일단 대학은 나와야지!" 그렇죠, 이 사회는 중퇴자들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으니 일단 대학을 졸업해야죠.
언젠가 끊어야 할 텐데
취업하는 선배들이 생겼습니다. 동기들도 하나둘 사원증을 받기 시작했죠. 찜찜했지만 취업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분위기에서 혼자 여유 있게 뒷짐 지고 있는 게 더 힘든 법이니까. 대단히 준비를 해서 입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들어와 보니 역시 학창시절에 생각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돈이 절실한 시기에 매몰차게 쫓겨나는 선배들을 얼마나 많이 봤었는지요. 지금이라도 나가야 할까. "미쳤어? 이제 막 취직했는데 바로 퇴사한다고? 그러다가 두 번 다시 일 못하는 수가 있다!"
그때 나왔어야 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또 열심히 했습니다. 4곳의 회사에 다니는 동안 금세 과장이 되었고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올라갈 곳이 얼마나 남았을까 세어 보니 별로 많지도 않았습니다. 사장이 될 것 같지는 않고, 이제는 정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미쳤어? 이제 곧 애가 학교에 가잖아!" 두 귀를 틀어막고 도망치듯 회사를 뛰쳐나왔습니다. 2년 전의 일입니다.
퇴사가 능사는 아닙니다. 조직에서 자아실현하시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본인 하기에 따라 수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또 조직이기도 합니다. 다만 제가 조직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 그렇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들었던 그런 일을 할때 마다 말이죠. 한국인으로서, 도시인으로서 해야 할 일도 물론이고요.
퇴사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 지금,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게 아니라, 해야만 했던 일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그래서 정작 하고 싶었던 걸 까맣게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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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대화와 글쓰기, 산책을 좋아합니다. 여러 회사에서 영업과 기획을 했고, 장사를 했고, 전국에서 토론모임을 열었습니다. 2019.6월, 개성을 주제로 한 책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