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균형을 찾을 때 아름답습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아무렇지 않으세요?” 부부동반 모임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 남편은 마치 감정 없는 로봇 같다는 장난 섞인 아내의 말이 화근이었습니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합니다.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했습니다. “글쎄요. 대부분은 너무 작위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려고 하지 않나요. 그런 걸 보면 슬프기보다는 오히려 낯간지럽긴 하죠. 빨리 감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황당한 표정으로 저희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람들. ‘여자가 마음고생이 심하겠네.’라는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감정 기복이 적은 사람에게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힘들 거라는 편견 때문일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경험을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첫째, 아버지를 통해서입니다. 평생 아버지의 눈물을 딱 한번 봤습니다. 대놓고 활짝 웃으시는 법도 별로 없으시죠. 그렇다고 아버지와 함께 한 저의 유년시절이 무채색이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화사한 파스텔 톤에 가깝죠. 약수터에 가는 내내 나누었던 대화들. 날이 풀리면 교외의 개울가로 견지낚시를 하러 간 기억. 주말마다 밭에 가서 고추, 상추, 가지를 비롯한 각종 채소를 한 아름 안겨주시던 기억. 하루 이틀의 이벤트가 아닌 평생에 걸쳐 꾸준히 이어진 이런 순간들이 모여 누구보다 풍성한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 생활 중 가장 면회를 많이 온 사람,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사람도 아버지였습니다. 물론 감정 없는 보고서 같은 편지들이었지만요. ‘1. 나는 잘 지낸다. 2.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렸다. 3. 쎈(기르던 진돗개)이 털갈이가 심하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정말 이렇게 보내셨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지만, 제 삶의 구석구석에 남겨 놓으신 그 온기. 백 마디 말보다 더 강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아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감정표현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아내는 연애 초반부터 감정 기복이 없는 제 모습에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옆에 있는 남자는 대나무처럼 꼿꼿하기만 하니 전혀 마음의 위로가 되질 않았던 거죠. ‘사람이 이렇게 무딜 수 있을까?’ 궁금증은 시댁 식구들을 만나면서 풀렸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던 거죠. 언뜻 정 없어 보이지만 여태 만나본 그 누구보다 대화를 좋아하시고 가정적인 모습에 마음이 놓였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을 만나고 온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들 보니까 결혼 후에 변하는 남편들이 너무 많더라. 이런 이야기 들으면 예전에는 싱숭생숭했는데, 이제는 신기하게 아무렇지가 않아. 당신한테 이야기하면 보나 마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딱히 신경 쓸 필요가 없겠더라고. 남의 일에 쓸데없이 감정소비를 하지 않으니까 정말 좋은 것 같아. 이래서 부부는 닮는다고들 하나 봐. 당신 닮아가니까 세상 속 편한 거 있지?”
저의 감정 부족에 서운해하던 아내. 근 10년을 같이 살면서 이제는 그것 때문에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고 합니다. 감정 기복이 없는 것이 행복의 비결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누군가는 당장 감정적인 지지가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들쭉날쭉한 감정으로 가슴 아파해본 사람이라면 고요한 바다 같은 안정된 감정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압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나와 적당히 다른 사람을 만나야 서로의 부족한 빈자리도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 때문에 마냥 서운해하셨나요? 나에게는 없는 것들로 인해 내 마음이 균형을 이루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한 번쯤 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