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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Aug 06. 2019

할아버지와 올갱이국

후레쉬와 빈 물통 들고 올갱이 잡던 어린 시절

“누구? 몰라 기억이 안 나.”


할아버지는 몇 년 전만 해도 분명 정정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낮의 태양을 견디시지 못하고 갑자기 쓰러지셨다. 그때부터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약해지셨고 소중한 기억도 하나둘씩 떠나보내셨다. 장손이라며 그렇게 나를 예뻐하셨는데, 나 역시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모래성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억 중 가장 먼 곳을 더듬어 찾아가 보면 충청북도 충주의 한 단독주택이 나온다. 새빨간 벽돌의 멋진 이층집은 아니고 곧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단층 짜리 허름한 집이었다. 방이 한 갠가 두 갠가 그랬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충주까지 금방이지만 30년 전엔 낡은 고속버스를 타고 몇 시간을 꼬빡 가야 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막상 도착해도 집이 워낙 작았기 때문에 주로 아버지와 나, 이렇게 단둘이 주말에 1박 2일로 가곤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터미널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렇듯 할아버지가 마중 나와 계셨다.


할아버지 집에 가면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진귀한 것들을 먹을 수 있었다. 개구리 뒷다리나 올갱이국이 그랬다. 그 중 올갱이국이 가장 기억에 선한데, 구수한 된장 국물에 미끌미끌하고 살짝 비릿하기도 한 올갱이가 듬뿍 들어 있는 음식이라 사실 애들 취향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딱히 가리는 것 없는 나는 곧잘 먹곤 했다. 마당으로 뻥 뚫린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앉은뱅이 소반에 차려주신 올갱이국을 후후 불어가며 먹다 보면 비로소 시골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올갱이국은 끓이긴 쉬워도 재료 손질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음식이다. 해감 된 올갱이를 바가지에 넣고 바스락바스락 씻은 후 한소끔 끓여낸 후 속살을 일일이 빼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속살을 주한 줌 정도 모으는 것만 해도 하세월이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나중 일. 일단 올갱이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나. 저녁밥을 먹고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 할아버지, 아버지, 나 이렇게 3대는 후레쉬랑 빈 물통, 혹시 물고기 한 마리라도 잡을까 싶어 반도까지 챙겨서 인근 냇가로 향했다.


올갱이(다슬기가 표준어) / 출처: 한겨례신문


그러고 보니 올갱이는 늘 저녁에 잡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야행성이라서 그렇단다. 무릎 위로 바지를 한껏 걷어 올리고 냇가에 들어가 큼지막한 돌 주위를 살피면 어김없이 고동색 올갱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무리 고사리손이어도 금세 한 주머니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시골 냇가의 올갱이 인심은 후했다. 갓 채집한 올갱이를 물통 한가득 채워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면 할머니는 마치 개선장군 대하듯 기뻐해 주셨다. 이제 젖은 옷을 벗고 몸을 씻을 차례인데 그 방법이 서울과는 사뭇 달랐다. 몇 번의 펌프질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지하수를 끌어올린 후, 솥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물을 적당히 섞어서 온도를 조절하는 식이었다. 그게 또 그렇게 재밌었다. 샤워를 하는 건지 한바탕 물놀이를 하는 건지. 떠들썩하게 몸을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으면 바로 꿈나라 직행이었다.


다음 날 아침. 달그락달그락 소리에 잠에서 깨면 할머니는 언제 일어나셨는지 아침상 차리시느라 분주하셨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어제 잡아 온 올갱이로 만든 국이 틀림 없으렷다. 이제 막 일어난 손자에게 할머니는 새로운 놀잇감을 주셨다. 바로 삶은 올갱이살 빼기. 먼저 잘 익은 올갱이를 하나 집어 들고 속살 끄트머리를 바늘로 콕 찌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껍질을 잡고 뱅뱅 돌리면 속살이 쏘옥 나오는데 집중력이 대단히 필요한 놀이였다. 공들인 만큼 양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이내 지겨워져서 바늘을 내려놓고 할아버지가 빼낸 속살을 몇 번 날름 받아먹고는 마당으로 나섰다. 세로로 길게 뻗은 마당엔 각종 채소가 즐비했다. 가지며, 고추며, 상추며. 그 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메뚜기나 방아깨비 구경은 덤이었다.


한참 놀다가 "아침 먹자!" 라는 소리에 다시 쪼르르 대청마루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뽀얀 올갱이 국이 차려져 있었다. 배부르게 한 공기 뚝딱하고 후식으로 수박까지 마저 해치운 후에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안 그래도 몇 시간이나 걸리는 길, 게다가 주말 고속도로는 특히 더 밀리기 때문에 마냥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가며 터미널로 가서 버스에 올라타면 차창 밖으로 할아버지가 보였다. 부르릉. 매캐한 검은 연기와 함께 시동이 걸린 버스. 할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어느덧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연신 손을 흔들곤 했다.


올갱이국 / 출처: 나무위키


어느덧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군대도 다녀왔다. 어학연수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자 충주로 향했다. 예전의 그 허름했던 집이 아닌 언덕 위에 지어진 근사한 신축아파트였다. 단지는 깨끗했고 집은 쾌적했다. 방도 세 개나 있었다. 샤워하기 딱 좋은 미지근한 물도 잘만 나왔다. ‘이제 좀 편하시겠다.’라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는 아니셨나 보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틈만 나면 예전 집을 둘러보러 나가시곤 하셨단다. 쓰러지신 그날도 그곳 근처에 있는 밭을 돌보시는 중이셨고. 오랜만에 뵌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예전에 터미널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처럼.


“손주여 손주. 영감 장손.” 나를 가리키며 할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말을 건네는 할머니. “몰라 기억이 안 나.” 힘겹게 대답하시는 할아버지. “하이구, 이제는 장손도 못 알아보는 겨? 가실 때가 되긴 했나 부네." 모진 말로 애써 슬픔을 삼키시던 할머니는 늦기 전에 밥이라도 한 숟갈 얼른 들라며 식사를 차려주셨다. 올갱이국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올갱이국에 밥을 큼지막하게 옮겨 담았다. 몇 번 휘적휘적한 후 한 수저 떠서 후후 불다가 이내 입속으로 넣었다. 시큼하게 잘 익은 김치도 한 젓가락 집어 먹었다. 다시 올갱이국 한입. 그리고 김치 한 점. 기분 탓인지, 갓 잡은 올갱이가 아닌 집 앞 마트에서 사 온 올갱이라 그런지 내가 기억하던 그 맛은 아니었다. 예전에 그 미끌거리고 탱탱하던 식감과 민물 특유의 살짝 비린 맛이 없었다. 할머니께서 직접 띄우신 된장 맛은 여전했지만.


두 분은 한 번 더 거처를 옮겼다. 언덕 위 깔끔한 신축아파트에서 대전현충원으로. 우여곡절 많은 인생을 사신 두 분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신 지금도 사이좋게 서로의 옆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나는 올갱이국을 좋아하지만, 굳이 찾아 먹지는 않는다. 서울에서는 마땅히 사 먹을 데가 없기도 하고.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올갱이국을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아니 찾아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고 많은 음식점 중에 ‘올갱이’라는 단어가 내 눈에 대문짝만하게 들어왔으니까. 이미 배가 부른 뒤라 딱히 들어가진 않았지만, 그 후로 며칠 동안 올갱이국 생각이 떠나질 않더라. 언제 아버지 모시고 아들 데리고 올갱이국이나 한번 먹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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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형 / 프리랜서 작가, 브런치 작가, 기업 블로그 마케터.
나에게 어울리는 인생, 후회없는 인생을 선택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나를 찾아가는 생각연습'을 출간했습니다. <네이버 인문 화제의 신간10>  <YES24 2019 여름 교양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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