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차가움
"이 X끼 또 이러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H를 보며 Y는 진절머리가 난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다들 나한테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오."
H는 선물 받은 넥타이를 집어 당기며 눈가를 찡그린다.
그의 손에 잡힌 네이비 컬러의 넥타이.
몇 시간 전 H에게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가 취직 기념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탄한다고 뭐가 달라지냐? 고만 좀 해라 좀! 너 같은 말만 지금 4시간째야 X발."
Y는 H의 대학 동기이자 그의 과거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미 수없이 이 커플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그로서는 H의 신세한탄이 '반복재생'걸린 헛소리 일뿐이다.
"늦었다, 늦었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찾아오는 섬뜩함은 틀린 적이 없다.
고개를 돌렸을 땐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와 새근대는 소리뿐이었다.
07:27라는 시간과 지겹게 들어온 알람 소리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려주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지는 H였다.
어느새 일어난 그녀는 H를 위해 설탕을 뿌린 토스트를 해주었지만,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그는 토스트만 입에 물고 떠나버렸다.
같이 살기 시작한 지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3배가 넘게 차이 나는 샤워시간, 수건과 속옷이 따로 돌아가는 세탁기, 고약한 잠버릇의 소유자, 치우지 않는 쓰레기, 바닥을 쓸면 나오는 머리카락과 다리털, 몇 번을 봐도 공감할 수 없는 드라마와 새벽마다 소리 지르는 해외축구경기들.
서로를 깊이 알아간다는 건 서로가 살아온 세상이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크고 작은 다툼들이 있었지만, 혈기왕성한 커플에겐 싸움 뒤에 찾아오는 화해의 순간도 강렬했다.
서서히 찾아오는 이별의 순간도 망각할 만큼.
"다 정리할 거야. X발... 방에서 걔 짐만 빼서 보내면 끝이라고."
"니 몸부터 제발 가누고 얘기해라 제발 X나 무겁네 새X."
"5년이면 오래도 사귄 거지... 헤어질 때가 한참은 지났다고!"
"에휴, X신아, 너네가 그동안 헤어지자고 한 것만 세보면 손발가락으로도 부족하겠다."
H와 Y는 꿈에 그리던 복학을 하고 한 학기 동안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누가 먼저 연애를 하는 지로 내기를 했던 친구들에게 사준 술값만 10만 원이 넘어갔다.
"병X들ㅋㅋ 둘이서 맛있게 술이나 먹어라~"
"난 여친이 지금 좀 보자고 부른다. 아, 너넨 이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네ㅋㅋ."
"원래 복학한 학기는 적응하느라 얼타는 거지 뭐. 담 학기에 열심히 새X들아ㅋㅋㅋㅋ."
입대 전 연애가 마지막이었던 Y와 일말상초를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H는 그때부터 눈에 불을 켜고 여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나가기 시작했다. 여미새라고 욕을 먹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 H가 그녀를 만난 곳은 학과 단체 MT였다. 처음에는 같은 과인지도 몰랐지만, 술기운에 취해 이리저리 다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가 있던 방이었던 것으로 H는 기억한다. H는 그녀를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H를 보자마자 '이 사람 뭐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MT 뒤풀이에서 그들은 만 삼천 원짜리 차돌박이 짬뽕을 먹으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같은 학과, 2학번 차이, 나이는 한 살 차이, 14cm 차이가 나는 키, 신발 사이즈,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 인생 영화, 비 오는 날에는 감자전에 한라산 소주를 먹어야 하는 취향, 후줄근한 후드를 좋아하는 것 모두 그들의 연애를 로맨스 영화로 만들기에 충분한 재료였다. 신데렐라를 도와주었던 요정의 마법처럼 보여주기 부끄러웠던 민낯과 덥수룩하게 난 수염도 그들이 진정한 커플임을 상징하는 순간들이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영원한 로맨스는 현실에 없다고 했던가.
H와 그녀도 현실의 문제를 마주해야만 했다.
H는 취준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옆에서 열심히 응원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취업을 앞에 두고 예민해진 그녀를 언제나 받아주기만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대학생활에 미련이 남은 H는 그때부터 조금씩 대학생만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맛보곤 했다. 그녀도 H의 변화를 알아챘지만, 자신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점 때문에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보다 그녀를 짓누르는 2천만 원의 학자금 대출과 말할 수 없는 집안 사정이 그녀를 더욱 냉철하게 만들었다.
자신보다 여자친구가 먼저 취업에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H는 성공에 축하해 주면서도 불안함에 휩싸였다. 직장인과 졸업 예정인 대학생. 이 관계가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여자친구도 자신이 취업에 성공했으니 그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했을 땐 잠시나마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다. 하지만 사는 세상이 달라지면 삶의 기준도 달라지기 마련. 어느샌가 그는 스스로를 취업도 못하는 못난 사람으로 규정지었다. 직장을 다니는 여자친구의 삶을 동경함과 동시에 불안과 의심도 늘어갔다. 그녀가 직장문제를 털어놓을 때면 나오는 남자 선배 C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갖고 들이대는 공격수였고 자신은 구멍 투성이인 골키퍼였다.
그녀도 1년째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H를 보면서 답답한 마음과 동시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연상의 남자들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깔끔한 차림에 능력 있고 챙겨주는 순간들에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설렘을 발견했다. 다만, 대학부터 만나온 남자친구에 대한 책임감과 아직은 괜찮은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하는 그녀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둘의 다툼이 잦아졌다. Y는 매주 H의 신세한탄을 듣느라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였고 처음으로 두 사람이 2개월 정도 헤어졌을 땐 술친구, 해장 친구도 해주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H도 취업에 성공했고 두 사람이 동거를 시작한 것도 이맘때 즈음이다.
"흐음, 자긴 확실히 네이비가 잘 맞네. 남친 퍼스널 컬러에 맞춰서 준비한 넥타이 매주는 여친 어때? 좋지?"
출근 준비를 하는 H에게 넥타이를 매어주면서 그녀는 잠시나마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 드라마가 새드엔딩인 것까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온전히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H도 드디어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에 행복하면서 앞으로 몇 년 뒤에는 그녀와 결혼까지도 생각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잠결에 눈곱도 떼지 않은 채 행복한 얼굴로 넥타이를 매주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각자가 새로운 현실에 집중하면서 서로를 위한 에너지가 바닥이 나버렸음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요일에 야근을 마치고 온 H는 사회인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침대로 쓰러졌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카톡도 읽지 않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지만 당장은 지친 몸을 쉬게 하고 싶었다. 새벽에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그녀가 현관문에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술 냄새가 나는 그녀에게 왠지 모를 짜증 섞인 소리가 나왔다.
"지금까지 뭐하다 온 거야."
"으응? 내가 우리 부서에서 회식있다구 ㅇ아냈나?"
"연락은 해줬어야지! 뭔 일 생기면 어떡할 뻔했어!"
"아이, 그를 일이 읍써어어~ C 대리님이 차로 지밥까지 태아다 주셔꺼든.."
"... 일단 자고 얘기하자."
그는 속에서 차오르는 분노로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과 그녀가 놓인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 취한 채로 그깟 차 좀 얻어 탄 것은 질투와 걱정이 함께 고갤 들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가 터져 나왔다. 뜬 눈으로 보낸 새벽의 공기는 날이 서 있었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있음을 날씨가 먼저 알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였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뭐래는 거냐...아우 씨 이거 왤캐 무겁냐."
고개를 밑으로 처박은 그의 시선에 헝클어진 네이비색 넥타이가 들어온다.
"아저씨! 저희 사당역으로 갈게요!"
"풀어졌어. 넥타이."
그는 목 언저리에서 나풀거리며 매달린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버린다.
이내 창문을 열어 네이비 컬러의 넥타이를 도로 한가운데 던져버린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새벽 공기와 아지러이 일렁이는 도시의 불빛이 그를 반긴다.
넥타이를 놓아 보낸 그의 손에도 더 이상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하자, 우리."라며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없이 머릿속에서 예상했던 장면과 대사다. 관계의 끝이 왔음을 머리보다 피부가 먼저 알아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한 사탕 발린 말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미 여기까지가 끝이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덤덤하게 이별을 고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함께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그래, 고생했어."
고작 내뱉은 말이 최악이다. 하지만, 말이 중요하진 않다. 이미 끝을 확인한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 과정에서는 그리 많은 것들을 고려할 마음도, 시간도 없다. 서로의 존재가 부담과 상처가 될 뿐이라면 아예 관계를 놓아버리는 게 최선이 아닐까.
그렇게 두 사람은 깊어가는 겨울에 이별이란 결말을 맞이했다. 함께한 시간에 비해 담백했다. 아니 함께한 시간이 길었기에 담백했다. 날짜는 세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오래된 인연의 끝이라고 유별나지 않았다, H는 오히려 허무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다 왔다, 야 좀 정신 좀 차려봐!"
어느덧 택시에서 내려 편의점 앞을 지나고 있었다.
새벽 길거리는 언제나 그렇듯 이따금씩 달리는 택시를 빼면 차디찬 공기로 가득하다.
깊게 숨 쉴 때면 폐를 지나가는 찬 공기에 숨이 탁 멎는 느낌이 들곤 한다.
비어버린 공간으로 침투하는 것은 명확하게 느껴지는 법. H는 채워야만 한다는 강박에 편의점으로 향한다.
"야야, 뭘 그렇게 많이 사 새X야... 아 피곤하게 시리..."
"없으니까 사서라도 채워야 되는 거야. 없으니까."
Y는 H의 오피스텔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갔다.
"곱게 자라~으이? 내일 택시비는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문 닫는 소리에 술이 조금은 깬 H는 허전한 목덜미를 더듬거리지만 이내 찾을 생각을 접는다.
엎드려 누운 침대에 옅게나마 익숙한 체취가 묻어있다. 이내 던져버린 넥타이에 남아있을 체취를 생각한다.
H는 스스로 놓아주었다. 체취에 담긴 추억도 함께.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다 이내 새 넥타이를 생각하며 잠에 드는 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