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걱서걱 그리고 싶어졌다

시작은 그대의 억울함 만렙으로부터

by 그리다 살랑


둘째를 낳고 첫째 때는 모르던 엄마라는 행복을 조금씩 알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끄적거리길 좋아하던 나는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남편의 북한침투 직전의 어릴 적 사진을 보게 됐다. '어머 이건 그려야 돼' 무의식을 쫓아 서걱서걱 연필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얼굴만 덜렁 그렸다. 영락없는 현상수배범.


종이를 넘겨 다시 도전. 형아 입학식날 얼마나 나댔으면 그 얌전하신 시어머니께서 4살밖에 안된 애 따귀를 한대 날리셨겠나(볼을 꼬집었다고 하셨나 아무튼). 평생 떨 G랄을 어릴 때 다 떨어서 남편은 커서 떨 G랄이 없었다고 한다(아니던데). 따귀로 인해 상기된 볼과 시무룩한 미간 주름이 포인트였다. 북한에서 공수해 온 듯한 퍼런 점퍼와 아버님 바짓단을 잘라 만든 듯한 통 넓은 바지도 제대로 표현해야 했다. 목은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는구나. 한결같은 사람.



남편의 억울한 촌스러움이 어쭈 제법 표현됐다 느낀 순간 무엇이든 그리고 싶어졌다.

꼬불한 라면도 그려보고 [마들린느]를 그린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가방그림도 따라 그려본다.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던 [빨간 머리 앤]의 삽화도 그려본다. 왜 하필 이 그림일까. 앤이 자기를 빨간 머리라고 부른 린느 부인에게 부르르 화를 내고 있다.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부모 없이 고아로 컸는데 자기감정과 할 말을 당당히 표현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긴 당당히는 아니고 감정을 주체 못 하며 하긴 했지만. 친척분들이 아무리 잘해주셨어도 내 진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내겐 픽션으로만 느껴졌다. 그런 앤이 부럽기도 하고.


뭘 그릴지 몰라 끄적여 본 라면그림 / 루드비히 베멀먼즈의 스케치 중 /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앤은 단숨에 뛰어가 린드 부인 앞에 섰다.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진 채 입술을 부르르 떨며. 앤이 소리쳤다. "머리가 빨갛다고요? 아주머니는 무례하고 감정도 없는 사람이에요!"


[피터래빗]의 저자 베아트릭스 포터의 사진도 따라 그려본다. 튀어나온 아치형 현관지붕의 어두운 정도를 표현하는 데 애를 먹었다. 중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생각난다. 내게 자꾸만 예고를 가라고 권했었다. 뛰어나게 잘 그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저런 말씀을 하시지 했다. 돈도 재능도 의욕도 없던 반지하 집에서 혼자 웅크려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맨날 잠만 자고 혼자 할 일도 없었는데 그림이라도 매일 끄적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누가 날 돌봐주니 마니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그림이나 끄적일걸. 그럼 지금의 나와 좀 다른 내가 되지 않았을까. 머 지금의 나도 나쁘지 않다, 아니 지금의 나도 좋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내가 되어서 좋다.


내일은 뭘 그릴까 난 뭘 그리고 싶은 걸까 연필은 왜 서걱서걱 소리가 날까 색연필의 질감은 왜 뭉근할까 여러 색이 겹치면 이런 느낌이 나는구나. 점점 알고 싶고 궁금하고 하고 싶은 게 많아진다.





# 사진출처 : 빨간 머리 앤, 베아트릭스 포터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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