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김치가 그리웠다. 김치를 얻어올 곳은 없는데 직접 할 능력은 안되니 남편의 원함대로 종갓집 맛김치를 사 먹고 있었다. 남편과 애들은 좋아하는데 나는 집에서 담근 맛의 김치가 그리웠다. 김장하면서 하나씩 뜯어먹는 재미도 느끼고 싶고 따끈한 수육도 먹고 싶었다. 보쌈집에서 사 먹는 수육과는 또 다른 그 맛.
14살부터 엄마랑 살기 시작했는데 늘 별다른 반찬은 없었다. 이모가 보내주신 김장 김치를 포기채 놓고 맨손으로 죽죽 찢어 밥 위에 올려주셨다. 손톱에 벌건 고춧물이 들며 올려준 그 김치를 입안 가득 욱여넣으면 반지하 우리 세 모녀의 삶도 그 순간만큼은 푸근했다.
첫 김장은 1,2년 전인가 누군가 주신 배추 한 포기에서 시작했다. 안 그래도 김장김치가 그립던 차에 배추도 있겠다, 온라인에서 양념을 주문했고 배추를 절일 굵은소금을 사러 나갔다. 왜 소량은 안 파는지 제일 작은 사이즈가 3kg였다. 배추는 1 포기인데 50 포기는 절일 만한 소금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리책을 보니 내가 필요한 소금은 한 주먹도 안 되는 양이었다. (남은 2.9kg의 소금 어떡하지) 소금을 뿌리고 절인 후 물을 빼야 하는데 배추 밑동을 아래로 놔야 할지 위로 놔야 할지는 책에 안 나오는 거다. 교과서만 공부해서 서울대 갔다는 말은 다 뻥이다(응?). 지인찬스로 밑동을 위로하고 물을 뺐다. 양념을 치덕치덕 처발라 금세 한 포기 완성. 차오르는 뿌듯함에 남은 양념을 쓱 쳐다봤다. 오호라 한 포기 더 해도 되겠는걸?
다시 마트로 가서 배추 한 포기 더 사 왔다. 또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데 엄마 혼자만 재밌는(?) 걸 하니 7살 아들이 시샘을 한다. 그래 너도 한번 해봐 창의적 활동을 지향하는 엄마멋지지. 식탁 위에서만 하라고 했는데 위, 아래 위위아래 양념이 다 튀는구나 그래 어차피 닦을 거야. 양념이 넉넉하니 후하게도 발라준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김장도 할 만하다. 까짓 거 앞으론 내가 해 먹는다. 그동안 왜 먹고만 싶어 했나. 그런데 퇴근한 남편이 이 창의적 현장에 얼굴이 굳어진다. (얘는 집에만 오면 이래)
자, 과정이 즐거웠으니 결과도 즐겁겠지? 맛볼 시간이다. 짜고 맵다. 양념을 너무 처발랐나. 버릴 수도 없고 묵히기로 한다. 묵힌 후 씻어서 찌개 같은 거 해야지. 근데 돈 들여 힘들여 처바른 양념을 다시 씻어먹는 건 머 하는 짓일까.
지난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본격적으로 채비를 갖췄다.
'오마담'이란 인스타를 통해 절인 배추 10kg과 양념장을 구입했다. 양푼과 채반을 사고 바닥에 깔 비닐도 샀다. 무를 채 썰어 넣으면 맛있다기에 무도 사고 쪽파도 샀다. 준비완료! 그런데 필요치 않은(?) 것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앞치마를 두르고 비닐장갑을 낀 9살 아들이다.
"너 또 하게?"
"당연하지, 엄마! 내가 도와줄게!"
아......
니 책상이 너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해 보이는데...
반 갈라진 8개의 배추 덩어리들이 양푼에 담겼다. 지난번엔 양념을 너무 처발라 짜게 된 것 같으니 올해는 적당히 하기로 한다. 아들 이렇게 얇게 발라, 한 두장은 안 바르고 넘어가도 돼.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다음부터는 어린이용 비닐장갑도 준비해 놓으라는 아드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4 포기를 완성했다. 한데 양념이 이렇게 많이 남는 거 맞음? 반이나 남았다.
데자뷔 김장 다시 시작
양념이 아까운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 절인 배추 10kg을 다시 사 왔다. 올해의 창의 활동이 마무리된 줄 알고 맘 놓고 외출했던 남편이 집에 와서 절인 배추가 다시금 베란다에 놓인 걸 보고 이거 데자뷔냐며 깜짝 놀란다. 아냐 내가 다시 사 왔어 김장 또 할 거야... 다시 비닐 깔고 무 채 썰고 쪽파 썰고 아들 오고- 아니 이번엔 아들은 빠꾸! 본인도 힘든지 더 하겠다고 고집 피우지 않았다. 양념이 모자랄까 봐 새로 사 온 배추는 겉의 초록잎을 다 떼어냈더니 홀쭉해졌다. 그래도 남은 흰 배추를 김치통에 욱여넣고 미션을 클리어했다. 뭔가 고단하구나. 그래도 맛만 좋다면야. 두구두구, 캬 기가 막히다.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고 딱 내가 원하는 그 맛, 어무이 내가 해냈소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