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취미로 색소폰을 부신다.
아주 오랜 세월 한결같이 노력한 덕분인지
실력이 출중하시다.
음감이 있으셔서 노래도 잘 부르시고 다방면에 재주가 많으신 편이다.
돈 까먹는 재주도 겸비하셔서 사업하시다 떼인 돈도 많고 내가 결혼할 때쯤 다단계에 빠져 온 식구들 괄약근을 쪼으게 만드신 장본인이시기도 하다.
그래도 아빠의 근성 덕에 우리 네 식구가 먹고살았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느 날 아빠는 삼촌네 가게 오픈 전 행사를 하게 되었다며 본인은 색소폰을 불고 나더러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하 ~~ 부녀 품바를 원하시는 건지?
나를 뭘 믿고 노래를 하라는 건지?
아빠의 말에 의하면 가게 오픈 축하를 위해 모인 지인들 모두 노래를 한 곡씩 부를 예정이니 너도 한곡 준비해라 하는 정도였고 강요는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 내 등을 떠밀어 노래를 하라 한다면
안 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분위기를 망칠 자신이 없었다.
고민하던 차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남편은 예상 밖의 빈정상하는 말투와 말로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기 시작했다.
"암만 생각해도 니 좀 모지란 것 같다. 부르라고 하면 부르냐? 솔직히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를 실력은 아니잖아."
배를 두드리고 누워 시선은 티브이로 향한 채
구타를 유발하는 말을 어디서 배워오는 듯 내뱉는 남편의 죽통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노래 선곡도 할 겸 코인 노래방을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남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가는 김에 노래방 근처에 있는 참뼈에서 감자탕을 사 오라고 했다.
법이 나를 가로막는 순간을 경험했다.
평소 혼자 코인 노래방을 종종 가는지라 선곡 아니라도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곡 부른 후 감자탕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착하다.)
침대에 반나체 상태로 누워 야구를 보고 있는 남편을 보니 다시 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감자탕을 데워 차려 냈고 남편은 맛있게 냠냠 먹어 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국물을 그릇 채 마시기 시작했다. 다 먹고 내일 새벽에 운동을 가겠다나 뭐라나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후루룩 국물을 마셨다.
그러다 손이 미끄러졌는지 국물이 그릇 채 남편의 몸 쪽으로 쏟아졌다.
옷도 버리고 속옷도 버리며 화들짝 놀라 화장실로 달려가는 남편을 보니 내 입꼬리가 절로 실룩실룩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주 샘통이었다.
난 내가 생각해도 모지리가 아닌 착한 아내고 남편은 사악한 남편이다.
이런 남편과 이제 겨우 18년을 살았다.
언젠가는 남편에게 당한 많은 수모를 대갚음해 줄 날이 오겠지...
연애 빼고 18년 한 남자와 살아보니 이성에 대한 환상이 모조리 사라졌다. 티비에 어떤 멋진 남자가 나와도 "저 사람도 살아 보면 똑같을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래서 불혹 인가보다 어디에도 미혹되지 않는 나이~ 이성에게도 마찬가지~
남편 덕에 불혹의 진정한 의미를 더 체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