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1만 4천 명의 생명을 실은 기적-흥남에서 거제까지
포성이 흥남부두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등 뒤에는 대포 소리가 땅을 울리고, 앞에는 검푸른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 절체절명의 시간. 1950년 12월의 흥남부두는 지옥과 기적이 공존하는 기묘한 공간이었습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서로 배를 타겠다며 뒤엉켰고, 사람에 밀려 차가운 바다로 떨어지는 누군가의 비명과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절규가 칼바람에 섞여 부두를 휘감았습니다.
배 위에서 드리운 밧줄 하나에 수십 명이 필사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거대한 화물선의 램프 도어가 조금씩 들릴 때마다 사람들은 짐짝처럼 서로의 몸 위로 포개진 채 배 안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부두에서 하경숙님의 대가족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부둣가에 눈이 올 때는요, 소복소복 예쁘게 쌓이지 않았어요. 바닷바람이 워낙 거세니까 눈발이
사정없이 대각선으로 내리쳤죠.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저 배가 마지막 피난선이라는 소리가 들리는
데, 그 배가 불을 아주 환하게 밝히고 있었어요. 마치 마지막 희망처럼요.”
이미 배는 정원을 수천 명이나 넘긴 포화 상태였습니다. 미군은 안전과 질서를 위해 더 이상의 승선을 막으려 부두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불빛이 멀어지면 가족의 목숨도 가뭇없이 꺼져갈 절박한 상황. 잠을 설치며 기회를 엿보던 둘째 이모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새벽 두 시경, 돌도 안된 간난이를 등에 업고 홀로 불빛을 쏘아 올리는 배를 향해 무작정 달려갔습니다.
삼엄한 경계 속에 미군 해군이 앞을 막아섰고 차가운 총구가 이모를 향했습니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지만, 어머니의 본능은 그보다 강했습니다. 그때, 이모님의 입에서 떨리지만 단호한 외침이 터져 나왔습니다.
“I want to live!” (살고 싶습니다!)"
예상치 못한 영어 문장에 미군은 당황한 듯 멈칫했습니다. 이 척박한 땅, 아수라장이 된 피난길에서 터져 나온 생존의 언어에 미군은 이내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가족이 몇 명이냐고. 마음이 급했던 이모님은 우선 “파이브(Five)!”라고 답했습니다. 미군은 배가 곧 출발하니 빨리 가족을 데려오라고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이모님이 데려온 식구는 줄잡아 열여섯 명. 노인부터 어린아이가 포함된 대가족을 본 미군은 당황하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러자 이모님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번 애원했습니다.
“우리 부부와 젊은 사람들은 남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늙으신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이라도 저 배에
태워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자기 목숨을 담보로 가족의 생존을 구걸하는 그 처절한 진심이 전해진 걸까요. 한참을 무겁게 지켜보던 미군은 결국 거친 손을 크게 휘저었습니다.
“에브리바디(Everybody)! 노 바디 레프트 비하인드(No body left behind). 빨리 다 타!”
그렇게 열여섯 명의 대가족은 기적처럼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화물 칸에 올랐습니다. 간절함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이었습니다. 미군이 열어준 그 좁은 길은, 한 가족의 역사를 바꾸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배에 올라탄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원래 화물선이었습니다. 정원은 고작 60명에 불과했고, 배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그때 배의 지휘관이었던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배에 실린 무기를 모두 버려라. 대신 저 사람들을 태워라.”
군수 물자 250만 달러어치가 차가운 흥남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비워진 화물칸은 1만 4천 명의 피란민으로 채워졌습니다. 하경숙 님의 16명 대가족도 그 화물칸의 비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었습니다.
화물칸은 따뜻한 선실이 아니었습니다. 밑바닥엔 치우지 못한 오물과 역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악취마저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견뎌야 했습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포성이 들렸지만,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누군가 나직하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죄책감이 뒤섞인 뜨거운 눈물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23일, 배는 흥남 부두를 떠났습니다.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오히려 항해 중에 다섯 명의 아기가 새롭게 태어난 기적의 항해였습니다. 하경숙 님의 둘째 이모가 외쳤던 “I want to live”는 그날 배에 오른 모든 이들의 간절한 소망이었고, 라루 선장은 그 소망에 '기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저는 그날 흥남부두의 눈보라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평범한 일상은, 어쩌면 그날 흥남부두에서 누군가가 대신 버려준 무기와 맞바꾼 기적의 빛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만 4천 명의 생명을 싣고 거제로 향했던 그 배는, 지금도 우리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이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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