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괴로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철마다 감기를 앓으면서 각종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듯, 우리도 시시로 오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세상에 대한 면역을 얻는다.
괴로움의 종류는 다양하다. 간단하게는 나로부터 오는 괴로움과 타인으로부터 오는 괴로움,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나중에 가서는 왜 괴로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돈이든 뭔가를 크게 잃었을 때 괴로움이 생기고, 병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고, 인간관계의 마찰이나 나 자신의 지나친 근심 때문에 괴로운 경우도 있다. 왜 괴로운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잘 따져보면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는 ‘마음속 깊이 변화를 원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도 현실은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돈을 잃었을 때도 돈을 되찾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병으로 괴로운 것도 신체가 아픔이 없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고, 인간관계에서도 관계가 순조롭게 되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는 '나 자신의 근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 경우도 똑같이 대입해 보면 나 자신의 근심이 해소되는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괴로워진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나는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든지, 지금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다든지,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환경이 그렇지 않다든지 하는 이유가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런 괴로움이 생겼을 때 해결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변화를 하는 것, 둘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 셋은 괴롭게 사는 것.
이 세 가지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없다.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 세 가지 중에 뭐가 제일 좋을까? 괴롭게 사는 것은 좋을 리가 없고,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초탈한 사람이 아니라면 변화를 원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방법은 한 가지. 바로 변화를 하는 것이다.
변화가 쉬웠으면 괴로웠을까? 반문을 할지 모르지만 이 방법이 현실적으로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다만 지금은 괴로움에 휩싸여 변화를 할 방법도 모르고 엄두도 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아무리 방법이 보이지 않아도 결국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에너지는 어떻게든 흐르게 되어 있고, 시간도 흐르게 되어 있고, 변화를 하고 싶지 않아도 하게 되어 있다. 물리적으로든 화학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포인트는 그러한 흐름에 잘 올라타는 것. 술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알코올 중독도 술 없이 그 흐름에 올라탈 수 있고, 죽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던 삶도 살아가다 보면 그 흐름에 올라탈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단지 머리로 그 방법을 모를 뿐이지 자연의 기본적인 이치를 신뢰하고 그 흐름을 잘 탄다면 방법은 생긴다.
인간뿐만 아니라 식물도, 다른 동물들도, 무생물도 항상 변화를 원하고 있다. 식물도 끊임없이 햇볕을 향해 잎의 방향을 움직이고, 동물들도 먹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돌도 위태로운 위치에 있다면 중력을 따라 안정된 위치로 굴러가고, 물도 산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구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 인간이라고 해서 왜 방법이 없겠는가. 우리도 욕구를 위해 움직일 수 있고, 안정된 곳으로 구를 수 있고, 때에 따라 형태를 바꿔가며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이유 없이 괴롭다면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유가 없는 괴로움은 없고, 그것이 변화를 원하고 있다면 반드시 나아갈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 모르겠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일단 자연의 흐름에 올라타 보자. 언젠가 방법을 찾아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