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넥슨에서 ‘어둠의 전설’이라는 게임이 나왔다.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가 한창 인기를 끌 때였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어둠의 전설에 애착이 갔다. 귀여운 캐릭터나 낭만적인 음악도 좋지만 한 단계씩 레벨을 올리고, 기술과 마법을 배워나가는 것이 마음 한구석을 풍요롭게(?) 하였다.
아쉽게도 부모님이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집에 인터넷도 깔아주지 않으셨고, 나는 한 번씩 PC방에 갈 때나 할 수 있었을 뿐 즐겨하지는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레벨이 40이 되고, 80이 될 때에도 나는 저렙(낮은 레벨)에 머물렀고 그것이 한이 됐는지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 그 감성으로 게임을 해 보려 하였으나 이미 어둠의 전설은 고인물 천국이 되어서 초급자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 결국 끝까지 하지는 못했다.
어둠의 전설에서 레벨 99는 지존(지극히 존귀함)이라고 불렀다. 전사든 마법사든 레벨 99가 되면 더 이상 올라갈 레벨이 없었고 기술이든 마법이든 최대로 배운 상태가 되었다. 다른 유저들과 파티를 하고 인연을 만들면서 신나게 레벨을 올리고 기술과 마법을 배우고, 장비를 업그레이드하는 재미로 하다가 레벨 99가 되면 더 이상 그런 재미는 없고 마을에서 놀거나 레벨이 낮은 유저들을 도와주는 재미, 좋은 아이템을 모으는 재미로 했던 것 같다. 레벨 99 유저가 많아지면서 아마도 전직(직업을 바꾸는) 시스템이 도입되었을 것이고, 그 후로는 새로운 직업으로 레벨을 99까지 올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나는 전직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지만..). 전직을 하면 기존 기술이나 마법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직업의 기술이나 마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캐릭터를 키우기 전부터 레벨 99가 되어 어떤 직업으로 전직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또한 게임의 묘미였고, 그 이후에 1차 승급, 2차 승급, 3차 승급 이야기도 나오게 된 것 같다.
어쨌든 전직이나 승급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니 게임 이야기는 이쯤만 해두고 우리는 레벨 1~98까지의 삶도 중요하지만 지존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 레벨 99를 목표로 했든 아니면 게임이 재밌어서 하다 보니 레벨 99가 되었든 상관없이 레벨 99가 되면 더 이상 배울 기술도 마법도 없이 경험치만 올라갈 뿐 성장이 없는 것 같은 지존과 같은 상태가 온다. 어둠의 전설에서는 레벨 99에서 쌓은 경험치로 체력이나 마력을 올리거나 전직이나 승급을 할 수라도 있지 현실 세계에서는 경험치가 늘어나도 체력은 더 깎기고, 다른 직업으로 바꿔서 망하는 경우도 많다. 게임에서는 레벨 99가 되어 레벨을 더 올릴 수 없더라도 레벨이 80으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99였다가 50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지존을 찍고 더 이상의 성장이 없을 수도 있고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삶에서의 지존 상태는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직급의 최고점을 찍은 경우, 내가 목표했던 것을 성취한 경우, 내 삶의 레벨업이 필요하지 않고 안정된 경우, 이제 떨어질 일만 남은 상황 등이 있을 수 있다. 레벨 99가 되면 이 상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마을에서 지존 코스튬을 뽐내며 다른 유저들과 놀 것인지, 저렙의 유저들이 레벨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재미를 느낄 것인지,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사냥을 떠날 것인지, 혹시나 전직이나 승급이 가능하다면 그 길로 갈 것인지 말이다. 어둠의 전설이 재미가 없다면 로그인을 하지 않고 바람의 나라에 접속해도 되지만, 인생은 재미가 없다고 해서 다른 게임으로 바꿀 수가 없다. 인생은 눈만 뜨면 이미 게임에 로그인이 되어 있고 나는 이 게임만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레벨을 올리고 싶지 않아도 접속은 되어 있고, 사냥터에 가기 싫어도 어딘가에는 있어야 하고, 레벨이 99가 되면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다른 유저들을 피해 있고 싶어서 지도 맨 구석에 서 있어도 누군가는 지나가면서 말을 걸어올 것이고, 지존이 되었더라도 좋은 장비나 능력이 없으면 파티에 끼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레벨 10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존 이후의 삶을 반드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레벨 10은 레벨 10에 맞는 마법과 기술을 쓰면서 살면 되고, 레벨 20은 레벨 20에 맞는 옷과 장비를 착용하면 되지 레벨 99의 옷을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레벨 99 던전에 가고 싶어도 레벨이 맞지 않으면 죽어서 돈만 잃을 뿐이고, 레벨 99의 아이템을 얻으려고 현질(현금으로 아이템을 사는 일)을 해 본들 입지는 못하고 무겁기만 하다. 그리고 지존이 되면 무조건 좋을 것 같지만 막상 지존이 되어 보면 오히려 레벨 10 때 서로 힘을 합쳐서 사냥을 하던 때가 재미있었음을 알게 되고, 레벨 11이 되어 새로운 기술을 배웠을 때가 오히려 더 의미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쓸 수 있는 마법이 많아도 같은 마법을 수천 번 쓰다 보면 아무리 파워가 세도 지겨워지고 다른 직업이 갖고 있는 마법이 부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만약 지존이 되었더라도 현재 갖고 있는 능력과 장비에 만족하고, 승급을 원하면 그 목표를 향해 달리고, 혼자 사냥을 하는 것이 지겨우면 다른 유저들과 친해지면서 재미를 얻는 것이 좋다. 인생은 지존을 목표로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레벨 1부터 99까지의 전 과정이 모두 소중하고 필요하다. 지존이 되고 난 뒤에도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기와 의미 부여가 필요하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며 즐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지존이 되고 난 뒤에도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동기와 의미 부여가 필요하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며 즐기는 자세가 중요하다.
* 그림 출처 : lod.nex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