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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티마커 SALTYMARKER Mar 05. 2024

눈 오는 겨울 어리목 코스 정복기


1박에 7만 원인 게스트하우스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방음이 잘 안 되지만 손님들은 저녁에 조용했고, 방은 뜨끈뜨끈했고, 한라산을 오르기 전 하룻밤을 자기에는 딱 적당했다. 6시에 컵라면과 주먹밥, 물을 각 방의 문고리에 걸어 놓는다고 하셔서 일정을 아침 6시 기준으로 잡고 저녁에 푹 잤다.      


나와 네팔도 같이 갔던 배낭


5시 반에 기상을 하니 주변으로는 비가 오고 있었고,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한라산 주변 도로가 통제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한라산에 눈은 오고 있었지만 통제된 곳은 없어서 출발을 할 수가 있었다. 눈이 오면 산행에 어려움이 있을 수는 있지만 눈 오는 한라산을 등반한다는 정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새벽에 궂은 날씨의 어두운 산길을 운전하면서도 마냥 신났다.     


새로 산 스패츠를 끼고 눈을 맞으며 등산을 시작하는 모습


재작년에 영실 코스를 갈 때에는 길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안개는 많이 꼈지만 길이 미끄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어리목 주차장에는 눈이 와서 그런지 차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준 주먹밥을 먹고(단무지, 깨, 김이 들어간 주먹밥이었는데 약간 짰다), 옷을 단단히 껴입고, 귀를 덮는 털모자도 쓰고, 양말도 두 켤레를 신고, 이번에 새로 산 스패츠도 발목에 끼고(재작년에 영실 코스를 갔을 때 발목으로 눈이 들어와서 양말이 젖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또 새로 산 장갑도 끼고(두꺼운 장갑도 없어서 검은 장갑 위에 흰색 목장갑을 꼈던 기억도 있다..), 아이젠도 신고, 우비도 입고(우비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샀다), 산행에 나섰다.      


눈으로 가득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와이프


처음에는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서서히 눈으로 바뀌었고, 타닥타닥 우비 위로 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어리목 코스는 편도 6.8km고, 왕복으로 하면 13km 이상이 되는 코스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갔는데 생각보다 거리도 길고 힘들었고, 특히 초반에 계단만 계속 나오는 구간이 있는데 숨이 많이 찼다. 참고로 영실은 편도 5.8km, 성판악은 9.6km로 어리목 코스는 영실보다 힘들고, 성판악보다는 짧지만 초반에 가파른 구간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다.      


자주 오시는 분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가장 맛있다는 샘물


그래도 영실 코스 갔을 때보다 장비가 좋아진 탓인지 손도 덜 시렸고, 발도 덜 시렸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중간 이상을 가니 서서히 완만해졌고, 중간에 물을 마실 수 있는 샘에서 한라산의 깨끗하고 달콤한 물을 먹은 뒤에 다시 힘을 내서 갈 수 있었다. 경치도 점점 좋아졌고, 영실 코스의 설경처럼 넓게 눈이 펼쳐진 구간이 나왔다. 눈꽃나무는 적었지만 그래도 한라산 등반을 기분 좋게 하는 눈 덮인 겨울산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보온병 성공


그리고 영실에서 보온병에 보온이 제대로 안 되어서 컵라면을 못 먹었는데 이번에 컵라면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보온이 잘 되는 보온병을 구비한 터라 정상에서 컵라면을 먹는 기대도 갖고 있었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고, 우리도 자신감 있게 보온병과 컵라면을 꺼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준 육개장 사발면은 깜빡 잊고 가져오지 못했지만, 대신 신라면과 진라면을 가지고 왔고, 보온병을 개봉했더니 김이 날 정도로 물이 뜨거웠다. 그래서 우리는 전날 산 베이글과 뜨끈한 컵라면으로 속을 덥히고, 체력을 보충하였다.      


갑자기 구름이 사라진 한라산의 모습


올라가는 길은 계속 눈이 오고 흐려서 멀리까지 보지 못했는데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하늘이 걷히더니 흐렸던 풍경이 한순간에 맑아졌다. ‘아 이런 게 눈(eye)이 맑아지는 풍경이구나.’를 느끼며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을 했다.(산 날씨가 그렇듯이 금방 다시 흐려졌다.)


내려오는 길은 의외로 힘들었는데 발바닥에 붙인 핫팩이 딱딱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최근에 운동을 너무 안 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리는 점점 후들거리고, 발바닥은 아프고, 속도는 느려졌다. 10분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던 코스는 10분을 더 가도, 20분을 더 가도 끝이 나오지 않았고, 우리는 막연한 희망만 가진 채 고통스러운 다리를 이끌고 내려왔다(힘들었어도 다음에는 힘든 것을 새카맣게 잊고 좋았던 것만 기억으로 남아서 다시 오게 된다는 것이 함정). 그래도 영실 코스는 내려올 때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영실이 인기가 많고 어리목으로 올라가서 영실로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사람에 치이기도 하고 내 페이스를 잃기도 했는데 어리목 코스는 내려올 때 사람이 적어서 편안하게 내려올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차만 눈이 덮여 있음

  

주차장에 도착하니 우리 차는 눈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다른 차들은 눈이 쌓이지 않았는데 우리 차만 쌓인 것이다(그만큼 다른 차들보다 일찍 왔다는 뜻이겠지). 우리가 등산을 하는 몇 시간 동안 두껍게 쌓인 눈도 치우고, 산에서 얼었던 몸도 녹이고 천천히 한라산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이번 어리목 산행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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