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님 말고'의 정석, 직진녀의 진심은 통한다
강렬한 첫 번째 만남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이 심상치 않았다.
삶의 궤도에서 한 번도 보지도 못한 별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S언니가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때? 너무 웃기지? 신기하지 않아?"
"응, 그러게. 이런 소개팅 완전 처음이야. 소개팅이 아니라 100분 토론 본 거 같아~ ㅋㅋㅋ"
우리 둘은 깔깔 웃으며 디브리핑을 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한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언니는 이것을 그저 '재미있는 만남',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하지만 왜 내 머릿속에는 이 사람이 떠나지 않는 건지. 두근거리는 마음과 계속 생각나는 그 사람의 행동, 말투와 아우라로 인해 그날 밤 잠을 뒤척였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바로 언니에게 전화해서 저녁 약속 한번 더 잡아달라고 했다. 그러니 언니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엥? 아니, 왜? 이 사람은 너와 어울리지 않으니 내가 다른 사람 알아볼게."
언니는 내 마음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구만! 언니 딴에 선 그의 특이함과 센 성격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아닌데?
노노. 아니야, 언니. 난 다른 사람 필요 없고 이 사람이나 한번 더 만나게 해 줘.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언니는 계속 발뺌을 하며 안된다며.. 별로인 거 같다며.. 세상엔 더 많고 많은 남자들이 있으니, 자기가 다시 한번 알아볼 테니 계속 잊으란다. 너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나. 언니는 꾸준히 다른 얘기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대화의 주제를 소개팅남으로 바꿨다.
하지만 언니,
이건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스케일의 혜성이라고.
나의 계속되는 요구에 결국 언니는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 역시 그 만남도 언니와 소개팅남의 현란한 토론으로 끝났다. 그날도 관객이 되어 둘의 대화를 지켜보는데 중간에 잠깐씩 흘러나온 그의 말에 묻어나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당시 토론토 국제 영화제 티켓 값이 그 전 해 보다 많이 올랐는데 소개팅남은 그것에 대해 굉장한 불쾌함을 표현했다. 영화광인 그는 매년 영화제에 가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영화를 보는 것이 삶의 큰 낙인데 이렇게 값을 올리면 '사람들의 축제'라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의 뜻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는 사람도 퀄리티 있는 영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이 말에서 사회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일탈을 일삼으며 자유분방하게만 살 것 같은 사람 같았는데 막상 얘기를 하니 오히려 반전 매력이 있었다. 이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더 증폭할 수 밖에 없었다.
언니는 이 두 번째 만남을 끝으로 내 생각을 돌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님 기대했지만?) 내 마음은 언니의 예상과는 전혀 반대쪽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미 내 눈엔 콩깍지가 씌었고 마음은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이런데 과연 소개팅남 마음은 어떤 걸까?
두 번째 만남 후 애프터가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남자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네? 아니 왜? 내가 어때서? 궁금한 마음에 우리 둘을 주선해준 S언니 룸메에게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응.. 그러니까.. 걔 말로는 네가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겠는데.. 얘는 아직 진지한 만남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 거 같아. 너랑 사귀게 되면 왠지 갑자기 진지한 관계로 급속도로 발전할 거 같은 두려움이 있어서 잘 모르겠대. 그래도 네가 맘에 드면 한번 연락해봐~"
참 나..
진지한 관계로 급속도로 발전할 거 같은 두려움이라니 ㅋㅋㅋ
야!
나도 내 엑스 트라우마로 지금 진지한 관계 원하지 않거든?!?!
나중에 남편에게 왜 먼저 연락을 안 했냐고 물어보니 남편은 내가 너무 바른생활만 하는 사람처럼 들려 선뜻 먼저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잠깐씩 들어보니 내가 너어~무 바르게 자란, 단 한 번도 반항이란 걸 해본 적도 없고 일탈이란 것도 해본 적이 없는, 집-학교-집-학교-플러스 교회-가 일상인 데다 전공도 과학을 공부한 선생님이라니.. (틀린 말은 아님;;) 그래서 일탈과 파티를 일삼았던 자기의 자유로운 영혼과는 맞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해서 인연이 아니라 생각을 했다나.
참 나..
Never judge a book by its cover.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내 마음속에 반짝이는 혜성, 아니 빅뱅의 어마 무시한 힘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날 어떻게 보든 난 네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어쩜 좋을까나. 생전 보지 못했던 신 캐릭터 등장으로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사람 생각뿐이었다. 네가 정 대쉬할 마음이 없다면, 그까지 것, 내가 하지, 뭐. 그래서 나는 철저히 내 마음의 소리에 응답하기로 했고 언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사람 페북을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Hey! I had a really good time yesterday chatting with you. Seriously, you and S are just epic!
So, to be honest with you, I want to get to know you a bit more in a natural way. (ugh..I don't know how to say it.) This whole set-up thing is really new to me as well so I guess it's a bit awkward and I don't know what people usually do after this.
But I know I'm not looking for a serious relationship either at the moment, so no pressure. I just want to have a decent convo over coffee or beer with someone who holds a similar (or different) viewpoint as I do.
So if you are interested in having a nice cup of coffee or a good beer or whatever, let me know.
If not, that's cool with me too. It's gorgeous out today. Not as sticky as yesterday. I hope you get to enjoy some sun. And have fun at TIFF this weekend!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ㅎㅎ
그만큼 이 사람이 좋았나 보다.
꼬드긴 듯 안 꼬드긴, 하지만 잘 꼬드겼던 이 메시지의 포인트를 천천히 하나씩 잡아보면 이렇다.
어제 너랑 대화하는 거 너무 재밌었어.
너랑 S는 진짜 대박이야 ㅋㅋ
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난 너를 더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싶어. 이렇게 소개팅을 받는 것도 나한테도 새로운 경험이라 약간 뻘쭘해.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소개팅 후에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하지만 내가 아는 건 나도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아. (이게 포인트! 너와 같이 나도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걸 어필했다. 그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ㅋㅋㅋ) 그러니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어. (부담을 주면 안 만나줄 거 같아서..ㅎㅎ) 난 그냥 커피나 맥주를 마시면서 나와 같은 생각 (또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난 그것도 괜찮아.
(오~ 쿨쿨~ 완전 쿨~ 이런 쿨 투 더 맥스 한 쿨함을 보여줘야 함. 그래야 부담을 안 느낌 ㅋㅋ)
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어제처럼 끈 쩍 거리지도 않고. 햇살을 만끽하길 바라~ 그리고 토론토 영화제에서 재밌는 시간 보내! (난 네가 어제 TIFF에 대해 했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난 너에게 관심이 있다고 다시 한번 알게 모르게 뇌리에 박아주고 ㅋㅋ 날씨를 즐기라는 캐주얼한 말로 남자가 느낄 부담감을 줄이려 노력함 ㅋㅋㅋ)
'아님 말고'의 정석대로 그에게 직진했다. 이렇게까지 장황한 긴 메시지를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내가 느꼈던 것을 나름 진정성있게, 하지만 가볍게 전하려고 하니 메시지가 길어지게 되었다. 부담을 줄이려 부단한 노력을 한 거 같지만 이게 100% 내 진심이기도 했다. 나도 진지한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니 그냥 한번 더 만나 대화나 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다 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도 이 메시지를 보고 좀 놀랐다고 한다. 그냥 '저녁 먹을래?'라고 했으면 '바빠서 안될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텐데 내 메시지는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단다. 정성과 진심이 들어간 것 같아서. 대쉬할 때는 무조건 짐심이 담긴 긴 메세지가 답인건가 ㅎㅎ
상대방이 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코스타 리카 솔로 여행을 하면서 얻은 용기와 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마음 돌보는 여행에서 받은 에너지로 첫 스텝을 내딛을 수 있었고 (남자만 먼저 연락하라는 법 있나!) 이 새로운 에너지는 설사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하여도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여행에서 예기치 못하는 일이 일어나도 그냥 그대로를 여행의 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듯이 만약 이 사람이 거절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도 내 인생의 일부라 생각하며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다 하고,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도 깔끔하게 인정하는 것. 코스타 리카에서 배웠던 말이 생각났다. "No hay mal que por bien no venga.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그와 잘 안되면 그것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제각각의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랬기에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번호를 주지 않았다고,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당당하게 대쉬하는 내가 더 멋있게 보였다. 만약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뭐. 어쩌겠나. 사람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너 바지 끄덩이를 잡고 매달릴 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둘이서만 만나서 얘기해보고 싶은 건데 그것도 싫다면 오케이. 알았어, 좋음 나도 좋고, 싫음 나도 됐어. 어쩔 수 없지. 굿바이~
내가 무엇을 하던 타인의 마음을 조종할 수는 없다.
조종을 하려는 순간 그건 집착이 되고
집착은 나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니까.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마음뿐이었고 그때 내 마음은 이렇게 하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어마어마한 강력한 힘이 이미 나를 이끌고 있었기에 정말 마음 가는 대로, 결과가 어떻게 되던 상관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했다. 얼마나 후련하던지. 될 대로 되라지. 난 최선을 다 했다! ㅎㅎㅎ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을 가볍게 가지라는 게 이런 뜻인가.. 그때 처음 이 말의 참 뜻을 어렴풋이 느꼈던 거 같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니
30분 후, 페북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Hey! Let's hang out!
Next we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