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상상도 못 했던 모습의 남자가 내 앞에 앉아 인사를 한다.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들어와 우렁찬 목소리로 삿포로 한 잔을 시킨다.
동 공 지 진.
언니가 맨 처음에 한인 2세라고 했을 때 당연히 내 머릿속에는 그동안 교회에나 학교에서만 봤던 2세가 떠올랐다. 소개팅남도 내가 아는 그런 2세 중 한 명이라 머릿속에 대충 그림을 그리고 저녁자리에 나갔는데, 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내 데이터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이지 않은가.
머리 잘랐다면서.. 자르기는 한 건가? 이건 내가 생각했던 짧은 머리가 아닌데?? 그럼 그전에 대체 머리가 얼마나 길었다는 거야? 이 사람 뭔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수.. 수염이 있네??
아니,
그러니까 수염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닌데.. 그런 건 아닌데.. 내 주위에서 수염 있는 남자를 정~~ 말 본 적이 없었다. 전 남친이나, 지금까지 소개팅을 한 사람이나, 남자 사람 친구들 모두 다 수염 없는 민낯남이었다. 수염은 깔끔하게 면도하라고 있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길러도 되는 거야? 이런 싱그러운 생소함은 무엇이란 말이냐!(수염 하나에 이렇게 난리를 떠는 나는 시골 촌년인가..;;)
신선한 비주얼로 그는 나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지만 더 끌렸던 것은 그의 에너지였다. 기, 또는 아우라? 이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그 기묘한 기운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굉장히 낯설지만 엄청 끌리는 에너지로 "나는 나야!" 하는 느낌을 강하게 내뿜던 소개팅남. 자유분방한 스피릿을 마구 발산하며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한인 2세의 이미지를 산산조각 깨뜨렸다. 예상 밖의 사람이 나와 놀랐지만 의외로 그런 특별함이 내 온 신경을 그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절친 언니도 소개팅남을 이때 처음 보는 거였기 때문에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헛, 이건 이제까지 우리가 본적 없는 생명체인데!' 언니와 나, 둘 다 당혹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얘한테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주는 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서 그런걸까.
저녁식사와 동시에 언니는 작정이라도 한 듯, 이 남자 신상조사에 들어갔다. 만에 하나 이 소개팅이 잘 되기라도 한다면 절대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언니는 곧 자세를 바로 잡고, 투철한 사명감을 갑옷 삼아 소개팅남과 전투할 태세를 마쳤다.
잠시 이 언니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말도 거침없이 말을 할 수 있는 초능력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누군가에게 선뜻 물어보지 못할, 얼굴을 붉힐 수 있는 말을 대놓고 물을 수 있는 용기 있는 분이 아니던가. 늘 신선한 발상으로 토론의 장을 여는 언니의 스킬은 '소개팅남 파헤치기' 프로젝트에서 백 프로 발휘했다. 슝슝~ 따발총이 나왔다. 내 친구에게 이상한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없다는 일념 하에 언니는 쉴 틈 없이 공격의 화살을 날렸다. 그런 언니의 대범함에 흠칫 놀랬던 언니 룸메와 나. 이렇게 까지 해도 돼?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포같은 총알탄을 끊임없이 날렸다. 분명 몇 번 맞고 쓰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소개팅남은 끄덕없었다. 안에 마징가 Z가 살고 있나. 그는 언니의 그 어떤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주짓수를 하듯 언니를 계속 존중하며 아주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었다.
이 사람 뭐지?
수염에 무슨 특별한 파워라도 있는 건가?
난 이 광경을 옆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기만 했다. 손에 땀나게 하는 탁구 올림픽 파이널 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둘의 전투를 보고 있자니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 전이 생각날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빈틈없는 공격과 수비 사이에서 나는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과연 누가 골든골을 넣을 것인가?!
소개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의 중심은 언니와 소개팅남이었고 언니의 룸메와 나는 관객이 되어 열심히 이 토론을 지켜봤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소개팅은 난생처음이었다. 나 소개팅 나온 거 맞나. 나 지금 100분 토론 보고 있는 거 아니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두 사람은 토론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저녁 먹는 2시간 동안 놀람의 연속이었다. 언니의 신선한 질문에 놀라고 불쾌한 감정 하나 없이 조리 있게 차근차근 예의를 갖추며 대답을 하는 소개팅남에게 한 번 더 놀라고. 불꽃 튀기는 토론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순간, 언니는 바주카포를 날렸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유연한 논리를 가지고 철옹성 같은 수비를 하는 사람 아닌가. 소개팅남은 매트릭스의 네오로 변신해 그녀의 마지막 한방을 막았다.
와우.
이 남자 뭔가.
처음부터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키아누 리브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논리의 유연성을 가지고 요리조리 언니와 대화를 하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나 저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대체 어떤 내공을 쌓아 논 거지? 왜 이런 말에 불쾌해하지 않지? 얘 대체 어떤 사람이지? (틀림없이 수염에 슈퍼파워가 있는 거야..)
그 사람의 신상정보보단 대화에서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나는 더 매료되었다. 저녁식사 시간 내내 놀라워하며 티 나지 않게 속으로 조용히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 난생처음 보는 전무후무한 신캐릭터의 등장으로 내 마음속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은 강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말이구나.
그에게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