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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08. 2021

6.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1)

혜성처럼 강렬했던 너의 첫인상

코스타 리카에서 보냈던 시간은 지쳐있던 토론토 일상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짧은 2주 반의 여행이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보낸 시간은 구겨져있던 내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뜻이 있다고 하니 아무 쓸모없이 보이는 이 시간도 분명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용기가 생겼다. 인생이 나에게 던진 도전장에 당당히 맞서면 되는 거였다. 한번 해보지, 뭐. 어차피 지나갈 시간이라면 소극적으로 대하지 말고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살아보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일상생활 복귀 준비를 하고 있는 중, 절친 S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너 소개팅 한번 해볼래? 



그 전에도 언니가 몇 번 주선해주겠다고 했지만 일단 고사했었다.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몇 번의 소개팅이 있었는데 그들과의 만남은 실망만 안겨줬기 때문이었다. 별 흥미롭지도 않은 소개팅 후 남자는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명언을 만들어 낸 현자는 누구인가. 영양가 없는 만남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더 이상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만났다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면 또 어떡하라고. 내가 믿는 것이 한순간에 다 깨지는 고통을 다시 감수하기엔 내 마음은 너무 메말라 있었다. 그렇게 굳게만 닫혀 있었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은 코스타리카 여행을 통해서였다. 낯선 곳에서 마주한 타인의 친절함은 꽃하나 없던 사막 같은 마음에 단비가 되어주었다. 사람 만나는 거에 대해 거리낌이 없어졌고 마음속 타인에 대한 작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소개팅? 그까짓 거. 한번 해보지 뭐. 내 청춘을 이렇게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놈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shakeit은) 새로운 사람 만나 잘 먹고 잘만 사는데! 내가 못난 게 뭐가 있다고. 나도 충분히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자격이 있어. 



그때 언니는 몇 달 후면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어서 가기 전에 나에게 남자를 꼭 소개해 주고 가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나 가면 얘는 대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내가 하소연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유일한 넓고 깊은 바다와 같은 언니였는데..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없어지게 생겼으니 언니는 걱정이 컸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물심양면으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떠나기 전 너 남친 만들어 주고 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언니는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고 때마침 언니 룸메가 자기 어렸을 적 친구 (가족들도 잘 아는 family friend)가 있는데 아직 싱글이니 실비아 만나게 해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룸메가 여렀을 때 부터 아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간다고 생각하는지 언니가 곧바로 나에게 연락했다. 


소개팅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소개팅남의 간단한 신상정보를 알려주었다. 한국인 2세고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는 괜찮은 직장이 있고 엄청 길었던 머리를 얼마 전에 잘라서 좀 볼 만한 상태가 되었다고 했다. 언니도 한 번도 만나보진 않았지만 언니 룸메 말로는 머리 긴 거 지인~짜 별로였는데 머리를 다시 자르니 실비아에게 소개해 줄 수 있을 만한 나름 준수(?) 한 모습이 됐다고 했다나. 그러니 괜찮지 않겠냐며 내 생각을 물어봤다. 


그래. 그냥 만나나 보지, 뭐. 


큰 기대는 없었다. 소개팅이 들어왔을 때 부담과 기대 없이 세상엔 어떤 남자가 있나,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세상엔 어떤 사람이 있는지 알아나 보자 하는 마음이 더 컸으니까. 여행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그런 마음으로 소개팅에 나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한번밖에 못 만날텐데 나가서 맛있는 저녁이나 먹고 오자. 가볍운 마음으로 생각을 정리하니 부담은 훨씬 더 줄었다. 홀가분 마음으로 나가는 거여서 그 사람의 외모나 직업, 그 외에 것들이 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케이! 

언니 나 이번에는 나갈게. 






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8월의 어느 날. 

내가 좋아하는 블랙 원피스를 입고 코스타 리카에서 사 온 금색 날개 귀걸이를 했다. 내가 이만큼의 디테일을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날은 정말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저녁 6시 약속이어서 우리 여자 셋 (S언니, 언니 룸메, 그리고 나)은 시간에 맞춰서 나왔는데 소개팅 남은 그날따라 밀린 일이 많아 10분-15분 정도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오케이. 그 정도 늦는 건 노 프라브럼. 어차피 여자 셋이 모이면 수다 떨 수 있는 토픽은 무궁무진하니 얘기를 하면서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조금이 조금 '더'로 바뀌더니 결국.. 한 시간 늦게 나타났다. 한 시간!! 시간 개념이 있는겨 없는겨! 나중에 들었지만 그날따라 비가 오고 가뜩이나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저녁시간에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주차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다.


만약 혼자 기다리는 거였다면 이 사람 뭔가.. 인연이 아닌가 보네.. 하며 그냥 돌아왔을 텐데 언니들이랑 있으니 다행히도 기다림이 그렇게 길게 느껴지진 않았다.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으니 드디어 나타난 그. 



그렇게 등장한 그의 모습에 

내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

오.

와.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어!

오?

와...


그가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앉는 순간, 

내 앞으로 

거대한

혜성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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