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 넘어지면서 배우니까
비단 에밀쎄 할머니의 음식에서으로부터 마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싸마라에 도착한 날, 내 캐리어가 열리지 않아 정말 고생을 하고 있었다. 캐리어에 넣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짐이 많아서 생긴 일이었다. 여행을 그렇게 다녀놓고 아직도 쓸데없는 것들을 가지고 다니는 내가 한심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면서 막상 행동은 맥시멀 리스트였다. '왜 안 열리고 난리야!'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캐리어에 풀어 봤지만 굳건히 닫힌 캐리어가 열릴 리 만무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에밀쎄 할머니의 딸. 슈퍼우먼처럼 나타나 가방을 몇 번 내려치니 (후려치는 것에 더 가까웠다) 곧 캐리어가 악어의 입처럼 쩍 벌어졌다. 씨익 웃으며 시크하게 한마디 덧 붙인 그녀. "실비아, 이거 다시 쓸 수 없으니까 내 배낭 줄게." 안 그래도 된다고 했지만 어차피 자기는 당분간 여행할 일도 없고 여기서 새 가방을 구하려면 비싸니까 그냥 가지라고 한다. 먼지에 쌓인 배낭을 탁탁 털어 흔쾌히 건네주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이 가족은 사랑만 먹고 자랐나. 왜 아무것도 아닌 아무개에게 이렇게 친절한 건데. 타인의 대한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것 같았다.
과분하게 받은 친절함 덕분에 몸과 마음도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마음만 살쪘으면 좋으련만 내 몸은 나의 바람과는 달리 너무 정직했다. ㅠㅠ) 과하게 받은 환대를 보답해 드리고 싶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다. 할머니 손주들과 함께 2개 국어로 된 책을 만들면 어떨까? 내가 그나마 할 줄 아는 거라곤 가르치는 것 밖에 없으니까.
때마침 코스타 리카 어머니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당에서 노는 할머니의 쌍둥이 손녀를 조용히 불러 엄마를 위한 책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무엇을 만든다고 하니 아이들은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흔쾌히 "Si! (Yes)"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들의 은밀한 듯 은밀하지 않은 프로젝트.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아이들을 앉혀놓고 스페인어와 영어 문장을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아이들이 영어를 하나도 못 하기에 내가 스페인어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는데, 고맙게도 아이들은 나의 개떡 같은 스팽글리쉬 (Spanglish)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물론 소통이 원활하게 안 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온갖 바디 랭귀지를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니 이틀 뒤 작은 책 하나가 완성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쉬는 시간에도 '공부'를 해야 하니 때때로 지루해할 때도 있었다. '난 놀고 싶은데 왜 앉아서 글을 써야 하냐고요!'라는 귀여운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니 좋아했다. (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거 하나도 읍단다! ㅎㅎ) 어머니의 날을 맞아 할머니 딸에게 선물하니 고맙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던 게 기억난다.
코스타 리카에 오기 전에는 끊임없이 다른 선생님과 나를 비교하며 자기 비하를 했었다. '왜 이거밖에 못해!'라는 말로 선생님 자격미달이라는 딱지를 크게 붙여놨었는데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완성하니 나름 나 자신이 멋있게 보였다. 이 정도면 나도 꽤 괜찮은 선생님이 아닐까. 그래, 이렇게 하면 되잖아.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되는 거야.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조금씩 회복되갔던 자존감이 아이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나서 더 반듯하게 펴졌다. 일상으로 돌아가 학교 업무 때문에 지친 날 꺼내 볼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을 하나 만들게 되어 감사하기도 했다.
바닥을 보였던 자존감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하니 새로운 꿈이 그려졌다. 스페인어를 꾸준히 배워서 언젠가는 스페인어로 중남미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고 싶다는 꿈. 먼 훗날 스페인어로 솰라솰라 유창하게 말하며 뜨거운 중남미 태양 아래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는 어학원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비치에 나가 신선놀음을 하며 독서를 했다. 배고프면 할머니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학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매일같이 부드럽고 스위트한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했다. (살이 안 찔 수가 없었다.) 원래는 일주일만 머물다가 3박 4일 자유여행을 떠날 계획 했었는데 일정을 변경했다. 여기가 너무 좋은데 굳이 떠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래서 코스타 리카 마지막 날까지 할머니 집에 있기로 했다. 나에겐 코스타 리카의 그 어느 풍경보다 할머니 집에서 느끼는 사람의 따스한 기운이 더 필요했으니까.
이보다 더 평화롭고 편안할 수 없었던 싸마라의 스테이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싸마라에서의 마지막 날, 도시에 사는 에밀쎄 할머니의 다른 딸과 손주가 놀러 왔다. 오랜만에 만난 딸을 위해 할머니는 큰 잔치를 준비하셨다. 에레디아에서 있었던 릴리아나의 뻘쭘했던 가족 파티가 생각이 나서 쭈뼛하게 있으니 할머니는 뭐 하는 거냐며 나를 식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내 밥을 챙겨 주셨다. 다른 가족들과 같이 동일한 양과 퀄리티의 저녁이었다.
잠시나마 그 가족의 일원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하하호호 웃으면서 가족들과 만찬을 즐겼던 것이 언제였더라.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했다. 불편했던 말과 날카로운 고함이 오고 갔던 저녁 테이블. 상처로 엉켜있어 피하고 싶었던 자리. 상한 감정에 음식의 맛을 느끼지도, 음식을 준비한 엄마에게 감사한 말을 건네지도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평범한 저녁시간이 누군가에게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갖기 힘든 것을 그들은 알까.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으면서 밥 먹는 것을 원한 것뿐이었는데, 우리 가족한테는 이 것이 왜 이리 힘든 일이었는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에밀쎄 할머니의 저녁을 먹으며 울컥했다. 따뜻한 집밥이 주는 안정이 이런 거였구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하지만 큰 행복에 감동했다. 내 마음에 봄의 따스한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사막 같은 마음을 뚫고 올라온 작은 꽃망울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 피고 있었다.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해야 하는 건가보다. 그제야 비로소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커다란 강에 작은 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었다.
오늘을 두고두고 기억해야지.
이날 느꼈던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마지막 짐을 싸면서 그런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짐을 다 싸고 생각을 정리하려 침대에 누우니 기억 속 한 곳에 간직해두고 었던 글귀가 불현듯 떠올랐다. 여행지에서 물건을 놓고 온다면 다시 돌아가지 않겠지만 사람을 두고 온다면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 같은 곳을 두 번 여행하는 일은 드물지만 만약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물건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20대 초반 이병률 산문집에서 읽었던 글이다. 읽었을 때 깊은 여운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마지막 밤 코스타 리카 여행을 정리하고 있으니 그제야 이 말이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됐다.
코스타 리카에 다시 돌아올 일은 아마 없겠지만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에밀쎄 할머니 가족 때문에
돌아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