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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04. 2021

2.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코스타 리카에 도착하니 밤은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는 동안 기사 아저씨가 안 나와있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짐을 가지고 공항을 나오니 걱정했던 것 과는 달리 저 멀리서 타코처럼 배가 볼록하게 나온 아저씨가 보였다. 그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Hola Sylvia! Bienvenidos a Costa Rica!"


아, 얼마 만에 듣는 스페인어인가. 마음이 두근거렸다.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올라!'라는 소리를 듣고 싹 녹아내렸다. 마음이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하다니. 신기했다. 기사 아저씨가 차에 짐을 싣고 우리는 앞으로 내가 일주일 동안 머무를 하숙집으로 향했다. 에어컨이 나오지도 않는 허술한 차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 낡은 차야말로 내가 중남미에 온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열심히 액셀을 밟으며 달리는 동안 창문을 끝까지 내린 후 눅눅한 코스타 리카의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내가 여기, 낯설지만 너무 익숙한 이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를 감싸는 습도를 통해 온전히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어떤 것이 꿈틀, 움직이는 듯했다. 눈을 지긋히 감고 창 밖 풍경을 눈에 담고 있자니 지난 몇 년 동안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과테말라에 살 때 파릇했던 내 모습과 그 이후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며 살던 내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혼자 긴 터널을 걷는 것만 같았던 시간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울컥했다. 차 안에 맴도는 퀴퀴한 냄새가 그런 나를 위로해주는 듯했다. 향기롭지 않은 그 냄새는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습한 바람을 맞으며 여러 감정을 마주하는 동안 어느덧 하숙집에 도착했다. 아저씨가 벨을 누르니 깐깐하게 생긴 주인집 아줌마 릴리아나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아줌마 아들 방이 내가 묵을 곳이었는데 나무 옷장과 가지런히 놓여있던 공예품들이 기억에 남는다. 섬세한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공간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꼈고, 그래서 그런지 첫날은 별 탈 없이 쉽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주인아줌마의 간단한 아침을 먹고 어학원으로 향했다. 반 배정을 받기 위해 placement 테스트를 했는데 너무 오랜만에 듣는 스페인어라 그랬는지 단어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초보 반으로 배정을 받았지만 별 상관하지는 않았다.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으니까.


코스타 리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매일 따뜻한 햇살과 함께 수업을 받으니 없었던 에너지가 저절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토록 원했던 스페인어를 다시 배우고 있자니 오랜만에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녹슬어 있던 스페인어 실력도 새로운 환경에서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고, 어학원 선생님도 초보자 실력이 아닌 것 같다며 나를 매일같이 칭찬을 해 주었다. 선생님의 칭찬세례 덕분에 코스타 리카에 오기 직전까지 밑바닥을 보이며 쫙쫙 갈라졌던 내 자존감은 조금씩 회복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 내가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네! 스스로가 멋져 보이는 것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성취감이라 할지라도 이것 덕분에 내 삶 곳곳에 붙여 놓았던 자격미달 딱지가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혼자 카페에서 시켰던 라테와 콘 브레드. 별거 아니지만 내가 참 장하게 느껴졌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고 나서 남는 시간에는 다른 학생들과 열심히 돌아다녔다. 크게 인상 깊게 남는 투어는 없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독일에서 온 자매와 함께 버스를 타고 산호세에서 놀러 갔던 일, 트리니다드에서 온 아줌마와 함께 패티오에서 맥주를 마시며 남자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던 일, 그리고 시간에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궁리를 하던 시간.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이 모든 것을 혼자 하고 있다니. 그것도 매 순간을 즐기면서 말이다.


내가 무언가를 이렇게 즐겁게 한 게 언제였지? 지칠 대로 지친 일상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재미를 다시 느끼기 시작하니 말라있던 배움, 아니 삶에 대한 열정이 다시 샘솟기도 했다.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 아주 오랜만에 긍정 에너지를 발산하며 코스타 리카 생활을 열심히 즐겼다. 일상에서는 그토록 빨리 지나가기만 바랬던 하루였는데 여기 와서 보니 하루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참 자주 들곤 했었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재미와 그들의 친절함 때문에 인생에 대해 차갑게 변해있던  마음은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견디고 버텨야만 하는 하루가 아닌, 내가 주체해서 이끌고 가는 하루를 산다는   재미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혼자 여행을 아주  해내고 있는 것을 보니 스스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 마냥 대견스러웠다. 혼자서도 잘하는구나. 혼자 해도 그렇게 나쁠  없구나. 이렇게  수도 있는데  그렇게 소극적으로만 살았지.. 


 남자 친구가시 돋친 , " 같은 여자라면.."이라는 소리가  이상 귓가에 맴맴 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질문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렸다. 


나 같은 여자가 어때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가시넝쿨로 뒤덮여 있던 마음은 스스로 천천히 치유해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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