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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10. 2021

9. 소개팅남에게 전남친 얘기를 했다

본격적인 마음 청소시작!

내가 먼저 다가간 부담 없는(?) 데이트 신청에 소개팅남은 예쓰를 했고 그렇게 우리 둘의 첫 데이트 날짜가 잡혔다. 


여름의 끝자락이 보이던 9월 초 어느 날. 

언니들 없이 우리 둘이 처음 만나는 건데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페이스로 이 사람을 알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첫 데이트가 잡힌 날 내 마음은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9월 초였지만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워서 그랬는지 몰라도 가을이 조금 늦게 오는 듯했다. 늦장을 부리며 아직까지 남아있는 여름이 참 고마운 날이었다. 데이트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으니까. 아주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흰색 여름 원피스를 고르고 간단히 꾸민 후 데이트 장소에 나갔다. 커피숍이나 펍 패티오에 앉아서 얘기를 나눌 줄 알았는데 소개팅남은 이렇게 소중한 날씨 좋은 날을 커피숍 안에서 낭비하기엔 너무 아깝다며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근처 공원에 가자고 제안을 했다. 


나는 흔쾌히 콜! 


뭔들 안 좋으리~ 

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오~

당신과 함께라면~ 

(아우.. 오글거려. 콩깍지 제대로 씌워지면 이렇게 무섭습니다. ㅋㅋ) 


그래서 해가 서서히 서쪽하늘 위로 지고 있을 즈음, 다운타운에 있는 Trinity Bellwoods 공원 근처에 있던 약속 장소에서 그를 만났다. 버스에서 내리니 청바지에 청재킷을 입고 음악을 듣고 있던 그. 노을이 지는 해를 뒤로하고 무심한 척 노래를 듣는 그의 모습은 너무 쿨해 보였다. 이렇게 치명적인 남자를 봤나. 이미 첫 만남부터 빠져있었지만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더 눈이 뿅~ 가버렸다면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이려나. ㅎㅎ


"헤이~" 


"헤이!" 


우리 둘 다 저녁을 먹고 만난 거라서 소개팅남의 제안을 따라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선선하게 부는 늦여름 바람. 

천천히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저녁노을.

여름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는 젊은 힙스터들의 웃음소리. 


이런 분위기에서 공원을 걸으니 어색할 줄만 알았던 만남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떤 얘기든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난 참 많은 얘기를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털어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느끼고 있던 내 정체성에 대해서, 나를 참 많이 아프게 했던 내 전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는 가족 이야기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무슨 깡으로 첫 만남에 이런 세세한 이야기를 다 털어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이 사람은 다 들어주지 않을까. 내 느낌을 믿고 한번 다 얘기해 볼까? 하는 마음에 다 얘기했더니 정말이지.. 이 사람은 다, 심지어 파혼했던 이야기까지,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아무런 편견도 없이. 얘기를 하는 동안 이 사람이 나를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더 신기했고 이내 더 궁금해졌다. 왜 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데?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내가 좀 이상한 사람들을 소개받은 거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를 할 때 나를 어떠한 틀에 끼워놓고 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심지어 한번 소개를 받았던 어떤 분은 내가 석사를 했다는 걸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기회만 되면 박사과정까지 해보고 싶다고 하니 내가 너무 드세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 표정에서 느껴졌음) 소개팅 끝나고 받은 문자에 인연이 아닌 거 같다 했다. 나도 그분이 딱히 맘에 든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을 먼저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내가 석사 한 게 어때서? 자기보다 학력 높은 여자를 만나서? 내가 당신보다 영어를 잘해서? 당신이 생각했던 너무 고분고분하고 차분한 여자가 아닌 거 같아서? 


그때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 직전 그가 했던 말들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었는데 막상 성과 없는 만남을 가지면 가질수록 전남친의 가시 같은 말은 내 가슴을 더 후벼 팔 뿐이었다. 



"나 사실 너의 가족 부담이 돼. 그래서 너랑 더 사귈 수가 없어." 

"이 세상 여자가 다 너 같다면 난 다시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그런데 이때 당시 이미 다른 여자와 심각한 썸을 타고 있었...;;;) 



굴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난 내가 정말 제-대-로- 뭔가 문제 있는 줄 알았다. 나의 상황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찾기는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지. 그 사람은 자기의 돌변한 마음을 변호하기 위해 나에게 온갖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내뱉은 거였다는 걸. 차라리 어느 노래 가사처럼 빨래를 걷으러 가야 한다며 엉뚱한 변명이나 할 것이지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말을 뱉어놓고 헤어져서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을까. 헤어짐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픈데. (하기야.. 세상에 안 아픈 이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발끈하면서 내뱉은 그의 가시 같은 말은 오랜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지배했다. 나에 대한 믿음을 뿌리째 흔들리게 했고 나 같은 여자는 이모냥 이 꼴이어서 새로운 인연은 다가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이었는데.. 나와 관계를 정리하지도 않고 다른 여자와 썸을 타고 있었을 당시 나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걸 알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배신감은 말도 못 했다. 충격이었다. 내가 그런 찌질한 이유를 대는 별 볼일 없는 루저를 믿고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사귀었다니. 그런 사람과 결혼까지 약속을 했던 내가 바보처럼 보였다.


한동안 남자를 못 믿은 건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항상 가면을 쓰고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답답했다. 난 투명하고 싶은데, 그냥 나이고 싶은데, 내 솔직함 때문에 내가 상처를 더 받을 거라면 차라리 사람을 안 만나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꽤 오랜 시간 지내기도 했다. 가끔 나의 동굴에서 나와 몇몇 사람을 만날 때면 나와 '핀트'가 맞지 않아 새로운 관계에 대해 더더욱 회의감만 들뿐이었다. 정말 나는 내 전남친이 말했던 것처럼 문제가 있는 사람인 걸까.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들은 빙글빙글 돌며 마음속 깊은 곳 수수께끼로 쌓여만 갔다. 




코스타리카 솔로 여행을 하면서 짓눌려 있던 마음을 돌보기 시작했고, 곧 골치 아팠던 수수께끼의 첫 단추가 풀리기 시작했다. 낯선 나라에서 여행할 때 생기는 문제를 되지도 않는 스페인어를 쓰면서 오로지 나 혼자 풀어 나가다 보니 나라는 사람은 참 괜찮고 당당하고 씩씩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때서? 내가 왜? 내 과거가 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그렇게 의기소침해서 살아야 하는데? 당신들이 상상도 못 한 여행을 나는 할 수 있는데? 그리고 너무 잘하고 있는데? 그것도 여자 혼. 자. 서! 


여행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동안 나를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마음속으로 크게 외쳐봤지만, 사실 이 말은 지난 몇 년 동안 상처 받기 싫어 인생을 소극적으로 살았던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네가 어때서. 죄지은 것도 아닌데. 
널 숨길 필요도 없어. 이제 안 숨겨도 돼.
네가 가진  것과 경험한 모든 건 지금의 너를 만들어 준 자양분이야. 
지금 너무나 잘하고 있잖아. 걱정 마.
그러니 당당해져! 
And go get what you want.
Live your life. 
넌 그럴 자격이 있는 충분한 사람이야.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마음의 소리는 나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더 이상 나의 상처는 숨기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닌, 당당하게 감싸 안아야 하는 내 인생의 표창이며 삶의 지표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감싸 안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감싸 안아줘야 한다는 것도, 내가 나에게 당당해야 다른 사람에게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인정 못하는데 그 누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어. 


그래.

당당해지자.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난 꽤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상태에서 하게 된 소개팅남과의 첫 데이트는 나와 상대방에게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를 만났을 때 내 과거와 내 가족에 대해 말을 해보고 싶었다. 내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난 주춤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를 떠보고 싶어 그랬다기보단 나를 떠보고 싶었다. 내가 만든 잣대에 나를 재보자. 새롭게 살자고 했으니 얼마나 새롭게 살 수 있는지 한번 테스트해보자. 만약 이 이야기를 통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면 너도 결국 나와는 '핀트'가 맞지 않은 사람일 뿐이니 그런 사람과 인연을 맺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잘 된 일 아닌가. 



소개팅남에게 나는 전 남친과 4년 동안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진지한 만남을 가졌었고, 돌변한 그의 마음으로 인해 파탄이 났고, 인격장애가 있는 내 동생 때문에 가족 안에 항상 꺼지지 않는 불이 있다고까지 얘기를 했다. 그전의 나라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이야기였는데 여름과 가을 사이의 공기에 취해있는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내 마음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내 말을 경청하던 얘기가 끝나자 조용히 말했다. 


"응.. 그랬구나.. 많이 아팠겠다." 


그저 나에게 더 당당하고 싶어서 얘기를 해 본 거였는데 예상치 못한 따뜻한 공감에 마음이 더 열렸고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더 나왔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상대들이라면 이미 선을 긋고 벽을 쌓아 올리며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은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속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더 들어주고. 나한테 별로 관심도 없다던 사람인데 굳이 이렇게 잘 들어주는 그를 보며 혹시 이 사람이 카운슬링을 전공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노을빛 속을 걸으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공기를 느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몇 년 동안 마음에 뭉쳐있던 검은 덩어리가 다 부서져 내렸다. 내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을 통해 마음의 청소를 제대로 한 셈이었다. 



짧은 만남이 될 줄 알았던 그날의 만남은 해가 다 지고 어둑해질 때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공원을 벗어나 근처 펍으로 갔다. 그제야 마주 앉아 그를 보게 되었는데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졌으니 뭔들 안 멋있게 보이겠냐마는 내 얘기를 진정성 있게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들어준 그가 내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펍에서도 난 그에게 조잘조잘 쉴 틈 없이 계속 떠들었다. 

그렇게 내 얘기를 풀어내며 내 마음속에 가득 쌓여있던 쓰레기를 버리고 있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어떤 쓰레기가 있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맞장구쳐주며 열심히 마음을 청소하는 나를 따뜻하게 응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 사람은 이렇게 내 말을 잘 들어주는 걸까.

이 사람은 어떤 인생 스토리가 있는 걸까. 

어떻게 해서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지? 

이 사람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 

한 번 더 만나 얘기하고 싶다. 



그렇게 강력한 호기심에 못 이겨 다음 데이트도 또, 

내가 신청하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 뒷이야기. 


처음에 내가 너무 바르게 자란 사람같이 보여 별 관심 없다던 그도 이날 나한테 관심이 생겼는지 (아님 내 이야기가 그렇게 흥미로웠는지) 펍에 자기 가방을 놓고 왔다. 그 사실을 전철역에 다 도착해서 알았다는.. 아니, 어떻게 가방을 잃어버릴 수 있지? 말은 안 해도 가방을 까먹을 정도로 너도 나한테 관심 있었던 거지? 맞지? 흥칫뿡이다! ㅎㅎㅎ


세상 쿨한척했지만 남편도 가방을 까먹을 만큼 이때부터 (그러니까 첫 데이트 때부터) 나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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