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는 외모는 남편은 닮았고 성품, 성정은 나를 꼭 닮았다.
친절하고 상냥해서 동생들이 잘 따른다. 놀이터에 가더라도 다른 집 둘째들이 자기 누나, 자기 언니 두고 이 아일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에는 그런 동생을 보다 못한 다른 집 첫째 아이가 자기 동생에게 "야! 너는 왜 나 빼고 저 누나만 따라다녀?"하고 싸움의 발단이 된 적도 있었다. 교회에서는 어느 아이가 우리 첫째 아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고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자 첫째 아이는 왜 동생들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나랑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왜 그럴까 심각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아마도 친절하고 수용적인 성향 때문일 거다.
시작이 어렵다.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인 불안이 크다. 이 아이가 무언가 시도해보면 좋겠어서 며칠간 무수한 논리로 무장하고 입을 떼면 생각해볼 틈도 없이 싫어!하고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럴 때면 그래, 네가 나고, 내가 너다, 싶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잘하고 싶어한다. 몇 년 전, 아마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집에서 수학문제집을 풀었는데, 거기에 단원 평가 같은 개념의 페이지 제목이 '누구나 백점 맞는 문제'였나, 뭐 대강 이런 류의 내용이었다. 별로 눈 여겨보지 않았던 제목이었는데 이 문제를 풀다가 아이가 문제를 틀렸다. 그렇게 많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채점이 끝나자 아이가 대성 통곡을 하며 울었다. 괜찮아, 수고했어, 열심히 했잖아, 그걸로 충분해, 엄마랑 다시 한 번 풀어보자, 별의 별 말을 다해도 안 들릴 만큼 목놓아 울었다. 울음이 좀 잦아들자 아이 입을 통해 그 큰 서러움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백점 안 맞을 수도 있는데 왜 누구나 백점 맞는다고 해? 이거 만든 사람 미워! 백점 안 맞을 수도 있지!" 세상에나! 그 제목을 보고 자기 백 점 맞을 걸 기대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안 되니까 서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결국엔 자신을 그렇게 기대하게 만든 '제목 지은이'가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첫째 아이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누가 그러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아이는 늘 잘하고 싶어했다. 승부욕 있는 아이는 아니다. '이기고' 싶은 게 아니라 '잘하고' 싶은 거다. 이왕 할 거면 잘한다 소리를 듣고 싶어했다. 누가 칭찬이라도 하면 그 일은 너무 열심히 했다. 잘하지 않을 거면 안 하고 싶어했다. 어떤 일 앞에 서면 잘하지 못할까봐 겁부터 먹는다. 꼭 어린 시절의 나다.
그런데, 대단히 낯선 일이 일어났다. 아이에게서 듣는 체육 시간 달리기 실력이 빼어나진 않아도 꽤 좋았다. 어느 날 나의 아빠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갔다 온 적이 있는데, 첫째가 어린 시절 나와는 달리 잘 뛰더라 하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었다.
응? 달리기를 잘 한다고?
나는 운동치다. 몸치는 아니다. 무슨 운동을 시작해보든 처음엔 폼이 좋다는 말을 듣다가 결국엔 기량을 좇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랄까.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순 있는데 그 연습 끝에 '운동'의 영역에 들어가면 좌절을 맛보게 된다. 대학 다닐 때 배구 시간에 교수님께서 내 옆에 서서 나를 보시더니 아주 의아해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폼은 아주 좋은데 왜 안 넘어가는지 모르겠다고, 아마도 힘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고. 모든 운동의 기초인 달리기도 그랬다. 초등 학교 시절 운동회에서 내 손목엔 단 한 번도 도장이 찍힌 적이 없었다. 3등까지 도장을 찍어주는 운동회에서 나의 최고 기록은 4등이었다. 그것도 우리 조에 누군가 결석을 해서 그랬으니 결과적으로 나는 아마 뒤에서 두 번째 쯤으로 뛰었을 것이다.
나를 꼭 닮았다고 생각했던 첫째에게서 나와는 다른 의외의 '잘함'을 마주하며 나는 묘하게 이상함을 느꼈다. 아이들을 십 여 년 가르쳐왔고 심리 상담 공부까지 한 사람의 머릿속에 이런 이상한 생각이 떠다니고 있었다니 우습지도 않은데, 정말 그랬다. 마음 깊은 곳까지의 배신감은 아니었지만, 내 뇌는 가볍게나마 어떤 종류의 배신감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을 통해 기특하게도 결국 분리해냈다. 첫째와 나를. 나로부터 첫째를.
우린 닮은 면이 많은 모녀였지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이 명확한 진리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된 건 나에게 큰 유익이었다. 메타 인지가 작동하는 느낌이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모른 채 살고 있었구나. 이대로 살았다간 인생 어느 중요한 시점에 너를 나라고 생각하며 너 아닌 나를 위한 무언가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뒤늦은 깨달음도 감사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닮았지만 다른 너를 너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너로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