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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Nov 12. 2023

26 우리들의 연애 히스토리




 어느덧 콧가가 시큰거리는 추운 계절이 왔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무섭기도 하는 동시에 반갑기도 했다. 문을 열고 나서면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덮는 기분이 좋아서. 새로운 계절이 주는 신선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산뜻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동네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셋은 수원에 살 때 401동, 402동, 403동 각 한 동씩 담당하던 같은 학교 동창이자 동네 주민으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사이다. 서로의 연애사에 대해 속속히 알았고 심지어 서로의 남자친구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이들과 만나는 날은 연애 파트1부터 대화가 다시 시작된다. 이제는 흐려지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연애 히스토리는 가장 재밌는 대화주제가 된다.


 S는 우리 중에 가장 다이내믹한 연애를 즐겨오던 친구였다. 대학시절 만나던 남자친구와 노래방에서 듀엣을 부르는 영상을 SNS에 자주 올리기도 했고 놀이동산 데이트를 즐기며 제 나이다운 연애를 성실히 해내던 친구였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터라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나는 그 나뭇잎으로 친구의 이니셜을 만들어 놓기도 했고 겨울이 오면 하얀 눈 밭에 짧은 쪽지(?)를 남겨 놓기도 했다. 어김없이 그녀의 SNS에 나의 흔적 앞에서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올리곤 했다. 각자의 연애가 시간이 흐를수록 공동체 연애가 되어가는 시절도 있었다. 모두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만나 여섯 명이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서슴없이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내가 먼저 서울로 이사를 나오고 E가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레 우리의 주민 생활은 청산되어 이전보다 자주 보진 못해 낱낱이 알던 삶을 덩어리로 굵직하게 알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S는 평소 만나던 남자와는 정반대의 착하고 순수한 한 살 연상을 만났다. 늘 통통 튀던 그녀의 연애가 놀랍게도 차분해지기 시작했고 SNS에 올라오던 게시글의 수도 줄어들어갔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조금 더 차분한 연애의 기로를 잘 걸어가고 있나 지레짐작만 했었는데 그녀는 어느 날 우리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당시에 우리 셋 모두 연애 중이었기에 그녀는 우리에게 참 많은 질문을 했다. 남자친구랑 있으면 행복해? 어떨 때 이 사람과 더 먼 미래를 생각해? 지금 남자친구 말고 다른 남자가 궁금하지는 않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겐 고요하고 잔잔한 연애는 되려 재미없고 무의미한 연애로 느껴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꿈꾸는 연애일지라도 그녀에게는 조금 더 자극적인 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녀는 결국 인생 가장 착한 남자를 뒤로하고 세 살 어린 연하를 만났고 다시 그녀의 SNS는 활기를 되찾았다. 이전 나의 글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나의 연애 성향을 아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테지만 난 되려 그녀의 전 연애, 즉 차분하고 고요한 연애를 선호하는 입장에서는 아쉬움 가득이었다.


 '오빠 그래도 너무 착하고 좋은 분이신데'

 '근데, 재미가 없다. 친구야'

 '아, 재미가 없다면 답이 없네. 잘 헤어졌네'


 친구의 선택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입장으로 차마 재미가 없었다는 이유를 듣고서까지 아쉬워할 순 없었다. 사랑에 재미 빼면 시체 아니던가. 그 이후 반년만에 만난 그녀는 이전보다 더 많이 밝아짐이 느껴졌다. 비혼주의에 가깝던 S가 먼저 결혼한 E에게 결혼비용에 대해 묻기 시작했을 때 나와 E는 눈을 동시에 마주쳐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가 이래서 비혼주의자의 말을 다 안 믿는다니까'하며 말이다. 술자리가 한참 무르익자 S는 더 속도를 내어 술을 마셨다.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이래서 결혼할 인연은 다르다는 건가 싶다며, 오늘 많이 마셔도 된다 덧붙이며 그 이유는 곧 그녀를 데리러 올 3살 연하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그녀의 귀여운 주사와 행복해진 그녀의 표정덕에 나마저도 기분이 무한으로 행복해지는 날이었다. 오랜 세월 함께 행복을 나누고 고민을 공유하던 동네 친구들의 연애사는 늘 과하게 이입되고 진지하게 경청하게 된다. 내 삶만큼 응원하게 된다. 진심을 다해서 말이다. 밤 11시가 되어가자 술집 안으로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S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녀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앳된 얼굴과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에게 나도 악수를 청했다. 직접 말하진 못했지만 내 친구를 세상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담아서.



 그녀의 말로는 '내후년'이라 말했지만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봐선 '내년'에 그녀의 청첩장을 받을 것 같다. 벌써부터 야외결혼식장의 로망을 서슴없이 말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참 많은 과정들을 함께 살아오며 이리도 설레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사뭇 마음이 뭉클해졌다. 내 친구. 정말 행복하구나.


 비틀대는 그녀를 남자친구에게 맡기고 차가 사라지는 모습까지 보고서야 비교적 덜 취한 E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신혼을 즐기고 있는 E의 결혼생활 이야기도 참 마음 따뜻하게 했다. 처음 그녀의 남자친구이자 이제는 남편인 그를 봤을 때 내 친구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좋은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그녀의 귀여운 뒤꼭지가 에스컬레이터 끝에 닿았을 때 발길을 돌렸다.


 양손에는 그녀들이 바리바리 챙겨준 선물과 꽃다발이 한가득이었다. 별다른 날이 아니어도 서로 선물을 챙기는 우리들의 모습은 변치 않았다. 내 주변에 소중한 친구들이 내가 걸어가고 싶은 길들을 먼저 걸어가 주어 감사함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여전히 제 짝을 못 찾은 내게 S는 술 한잔 꿀꺽 넘기며 말했다.


 '셈케이 너는 걱정이 안 돼. 늘 야무지게 잘 살잖아. 좋은 사람만 만나온 너니까 분명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거고 결국 만날 수밖에 없어. 난 그걸 믿어 의심치 않아.'


 그러자 E가 이어 말했다.


 '셈케이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네 삶엔 좋은 사람들 투성일 거야. 시간에 쫓기지 말고 언제가 만날 네 인연이 눈 앞에 나타나면 두 팔 벌려 반겨줘.'


 S는 조만간 소개팅을 준비해 오겠다는 보다 반가운 소리까지 더해주었다. 힘든 이별을 딛고 일어나던 그 순간에도 그녀들은 내 곁에서 나의 앞 날을 나보다 더 확신해 주었다. 내가 살아온 걸음들을 뒤돌아보며 의심하려던 찰나 그녀들을 말해주었다. 잘 살고 있다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밤이 짙어지자 찬바람은 더 매섭게 불었지만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술의 힘인지 애정의 힘인지. 내 곁에 나의 삶을 나만큼이나 소중히 여겨주는 이들이 있기에 혼자의 시간도, 퍽퍽한 일상의 세월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아 양손 무거운 선물만큼이나 마음 가득히 사랑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인간관계는 좁아져가지만 결국 내 곁에 남은 인연들을 둘러보면 서로의 삶을 믿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 같다. 애석하게 나의 연애 히스토리는 잠시 멈추어있지만 이 공란의 시간도 언젠가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장식되지 않을까? 간간히 건물 사이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인다. 연말엔 되려 외로울만한데 뭐 이리도 마음이 풍요로운지 모르겠다. 좋은 인연들 덕에 내게 잘 살고 있다며 스스로도 응원할 수 있는 넉넉한 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초겨울 밤이었다.


 지금처럼 행복하자. 나의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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