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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Nov 05. 2023

25 서른두 살 지금의 나는 말이야




 잔잔한 드라마를 보다 문득이 울음이 터졌다. 여행을 다녀와 밀린 빨랫감이 가득해서. 바닥에 널브러진 옷과 담요를 정리해야 해서. 친구 가게에 선물할 그림을 그려야 해서. 며칠 물을 못줘서 시들해진 식물들이 보여서.


 밀린 감정들이 한꺼번에 뚫고 나와버려서. 모든 이유가 이유가 되고 설사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개의치 않을 만큼 그냥 흘러내리는 눈물에 속절없이 엉엉 쏟아냈다. 마치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엄마와 며칠 여행을 다녀왔다.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태워 보내드리기 위해 티켓을 끊는데 엄마가 주머니에 꼬깃한 오만원권을 욱여넣으셨다. 그게 왜 이리도 슬프게 접혔는지 덩그러니 침대에 앉아 하염없이 지폐를 바라보다 더 소리 내어 울었다. 슬프게 느껴진 이유가 가난은 아닐 테고 특별히 말썽 피운 일도 없어 불효의 못내 죄송함도 아니었을 텐데 그저 알아가는데 많아지고 감춰야 하는 게 많아져설까. 엄마의 날 것 같은 사랑이 되려 슬프게 와닿았다. 여전히 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날 바라보고 있는 듯해 뻣뻣하게 어른인척 했던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 또한 그저 추측이다.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눈물이 났다.


 슬픔의 원인을 애꿎어 찾지 않게 된다. 장황하게 나열해 봐도 감이 오지 않으면 그냥 왕창 울어버리거나 반대로 웃어버린다. 연애 중 돌연 날아오는 슬픔과 우울도 이별 후 끈질기게 따라오는 슬픔과 억울함도 굳이 이유를 찾지 않는다. 고민이 길지 않다. 그래서 비교적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처음엔 덜 사랑해서인가 마음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몇 번의 연애와 삶의 경험들이 말해줬다. 영원한 슬픔은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슬픔이 찾아왔다면 방석 깔아 맞이는 고사하더라도 물 한잔은 건넬 준비가 되어있을. 딱 그 정도의 의연함으로 나의 감정과 맞서게 되었다. 어렸을 때, 어른이 되면 울지 않을 줄 알았다. 어떤 상황도 기꺼이 맞이할 줄 알았지만 어른은 그저 남들과 돌아서 나만의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울음의 방법을 찾을 뿐, 여전히 아프고 힘들다는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난 어떤 달콤한 말에도 헤벌쭉 넘어가지 않아. 순간적인 감정은 감정일 뿐' 그렇게 감정을 다스린다고 호언해도 오히려 그러한 강직함이 부작용을 일으켰다. 되려 평범한 상황에 더 쉽게 감정이 무방비가 되어갔다. 장식이 화려한 말엔 방어력이 생겼으나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엔 와르르 무너지기도 했다. 가령 애써 참고 있는 슬픔을 천천히 보듬어 줄 때 없던 사랑도 샘솟기 시작했다. 그것도 어이없게 잔뜩 말이다.


 ‘셈케이씨는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속이 여려서 표현 못하는 슬픔들이 있을 것 같아요.’


 유관부서 대리와 제품 검수 차 물류센터를 향하던 날이었다. 나에 대해서 별 다른 정보도 없던 그가 문득 뱉은 말의 파장은 꽤 강렬했다. 평범한 회사원에 불구했던 그가 갑자기 운전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도 사뭇 귀여워 보였다. 그 순간 아찔했다. 나의 취약점이 바로 내면을 훅 들여다보는 멘트라는 사실에. 때때로 찾아온 슬픔도 그저 울어버리고 말면서. 여러겹의 포장지에 감싸진 상대방의 말들도 사람 좋은 미소 하나로 답하고 말면서 당최 제대로 알지도 못한 사람의 한마디에 잠든 연애세포들이 일제히 촉각을 곤두세우다니.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로 시작해 '정말 나를 알아본 건가?'라는 짜릿함을 지나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네'라며 혼자 몇 걸음 앞서나가고 만다. 우습게도 그럴 때 더 확신하게 된다. 어쩌면 화려한 말장난에도 넘어가지 않는 도도한 내가 아니라 애당초 슴슴한 숭늉 같은 말에 더 설레하는 타입이라는 것을.



 관계의 유효기간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의 추억이 자그마치 10년이야.'와 '오늘 처음 뵙는데 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요.'의 차이가 크지 않다. 시간의 누적이 준 힘보다 지금, 현재 나의 마음이 평온한지 아닌지의 기준이 관계를 정의하는 척도가 되었다. 단 일 년이라도 사랑한 연인과 헤어지고 남이 되는 과정에서도 관계는 시간보다 그때의 내 감정이 더 중요함을 증명한다. 고작 일 년도 안되었지만 당시에는 내 삶의 커다란 일부였기에 시간 대비 강렬한 관계가 되는건아닐까? 그렇듯 어느새 멀어진 옛 친구와의 거리에 더는 슬퍼하지 않는다. 힘든 회사생활을 서로 의지하며 함께한 동기 언니가 불현듯 연락을 모두 차단하고 몇 년 만에 연락이 왔을 때, 반갑지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도 잠시, 본인의 삶이 우선이라 몇 달간 근심 가득한 연락을 남겨둔 내게 몇 년이 지나고서야 아무렇지 않게 연락해 온 그녀에게 남아있는 마음은 없었다.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연락을 끊었다. 우리가 힘든 세월을 서로 토닥이며 보내왔지만 각자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를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기에 장황한 사연을 뒤로하고 관계를 정리했다. 거기까지가 그녀와의 관계가 끝이었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많이 사랑한 당신과 헤어지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털어내는 날 보고 친구들은 벌써 잊었냐며 의아해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일 년 내내 술만 마시면 그 당시 헤어진 남자친구를 상기하며 울던 내 모습을 아주 잘 알기에 그녀들은 나를 신기하듯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 솔직히 말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주 많이 슬펐고 오래 아팠다. 요즘도 가끔 꿈에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가는 당신이라 고백하며 굳이 그녀들 앞에서 울지 않는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당신과의 사랑이, 우리의 인연인 거기까지였음을 선명히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빠르게 괜찮아 보일 수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저 거기까지가 끝이었을 뿐이다. 그녀도, 그도.



 분명해져서 보다 더 솔직해진다. 친한 후배는 흔들리는 나뭇잎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남자친구가 어느 날 옆에 조용히 앉아 함께 나뭇잎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별 거 아닌 상황일지라도 그녀에겐 엄청난 순간이었나 보다. 그때를 회상하던 그녀의 표정이 꽤나 행복해 보였다. 분명해진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에, 그래서 솔직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장면을 함께 사랑해 줄 이의 존재를 귀하게 여겨 숨기지 않고 마음을 전한다.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나 3-1반 반장인데 너 나랑 사귈래?'와 같은 순수한 시절의 감정은 도려졌을지언정 사랑의 무게를 알고 내가 정의한 사랑을 알아가기에 그러한 관계를 마주하면 강하게 붙들게 된다. 사랑이란 감정이 나노단위로 소중해진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보인다. 문장과 단어 구석구석 내가 녹아져 있다. 울고 싶을 때 잔뜩 울어버리고 훌훌 터는 나의 털털함이. 어깨에 힘주고 살아가다 평범한 한마디에 주르륵 녹아버리는 여전히 폭닥한 나의 마음이. 아껴가며 지켜온 숱한 관계들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나의 변화들이. 그럼에도 사랑 앞에선 한 없이 관대한 나의 고집불통 낭만이.


 나를 알아가는 만큼 나를 감춰가는 법도 알게 되고 선명해짐과 동시에 미련 없이 놓아버리는 관계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당신의 안부를 짖꿎게 묻는 친구 앞에서 소주 한잔 넘기며 웃어버리는 여유와 잔뜩 울고 나서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사랑한다고 엄마에게 카톡을 보내는 엉뚱함이 내가 서있는 이곳 서른두 살의 내 모습이다.


 누군가에게는 별 대단치도 않은 흔한 나이일지라도 올 한 해 나는 서른두 살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생각할 만큼 내겐 의미있는 한 해다. 나를 많이 알아간,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많이도 고민한, 설령 정답이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온다 한들 나는 조금 더 나의 시야를 가져가는 지금이 힘들면서도 좋다. 그래서 두서없는 글들을 많이도 써 내려가는 한 해다.


 눈물을 멈추고 글을 다 쓰고 나니 비가 내린다. 흘러내린 눈물을 감춰주려는지 쉴 새 없이 비가 내린다.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어본다. 오늘도 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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