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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Nov 22. 2023

27 취향은 갖는다는 것




 개인의 취향을 갖는다는 것이 그다지 특별한 말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색, 물으면 바로 답이 나오거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내가 말하는 취향은 무형의 취향, 즉 맛도 온도도 색도 없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취향이다.


 한참 술과 밤이 좋은 이십 대 우리들의 주제는 학교나 당시 잘 나가는 연예인 이야기 또는 연애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깊지도 얕지도 않게 적당한 안주정도의 대화들이 밤이 지나 증발되어도 무방한 딱 그 정도의 대화가 시간을 채워주었다. 그만으로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 문득 뒤를 돌아보니 반짝이던 밤을 함께 보낸 친구들의 안부도 쉽사리 묻기 멀어진 지금에 와 있었다. 20대의 나는 무조건, 누가 봐도 E 80프로 정도의 쾌활형이었다. 처음 만난 사이와도 몇 분이면 편한 대화가 가능했고 새로운 환경, 분위기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신선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서서히 관계가 나를 무겁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 딱 규정된 날은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 간의 적절한 관계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나의 모습과 더불어 가까웠던 사이더라도 서로의 노력이 무의미하다 판단되면 천천히 돌아서는 용기까지 생겨갔다.


 그때는 참 의아했다. 한 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행복하고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된다 느껴졌는데 단 몇 년의 시간만에 이리도 바뀔 수 있나 싶었으니.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이유에 대해 글을 쓸 만큼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 것 같다. 취향이 구체적으로 굳혀져 갔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나의 삶에 좋은 에너지가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알아갔고 관계 속에서 나를 보호하는 나름의 연막 기술도 체득하게 된 것이었다. 딱히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이가, 세월이, 경험이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좋아했고 동경했다. 그 사람들의 인생이 나에게 귀감이 되기도 자극이 되기도 했다. 주체적이다, 사전적 의미를 떠나 스스로 내포하는 뜻은 '자신의 취향을 잘 아는 사람',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줄 아는 사람', '혼자의 삶과 함께의 삶에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람'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자신의 삶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갈 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음식 취향, 음악 취향, 패션 취향 더 나아가 성격이 다르고 종교가 달라도 앞서 말한 주체적인 본질이 선명하면 살아가는 가치의 방향이 비슷하다 여겨졌다. 과장 조금 보태어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 졌고 내게 소중한 만큼 그들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되는 기분이 더 나를 행복하게 했다. 전 세계 인구를 다 사귀어보지 못해 사람의 성향을 내 멋대로 나누어 보는 개똥철학일지 몰라도 자기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상대의 삶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 보였다.


 반면 누군가의 의해서만 행복해지는 성향의 사람들과 장시간 함께 있다 보면 쉽게 피로해졌다. 매번 본인이 아닌 다른 이의 눈치보기 바빴고 상대가 어떻게 느낄지만 고민한 채 스스로가 지쳐가는 사실을 망각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답답해왔다. 이 부분은 배려심 또는 이타적인 부분과 달리 불안하고 갈등되는 마음을 타인의 동의와 공감으로 안도를 느끼는 전형적인 불안형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물론 나 또한 나의 친구, 나의 부모가 행복하다면 곱절 행복을 체감하지만 나의 감정과 생각이 타인들의 인정으로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쓴다. 그러한 노력조차 없이 그저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게 피로를 주는 부류들이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의 관점에서 그저 흘러 보내면 되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가령 오랜 세월 알아온 사이가 나이가 들다 보니 다른 방향으로 가치관이 굳혀져 불가피하게 충돌되었을 때 오는 고민이 간간히 생겨갔다. 우리가 함께 해온 세월이 있기에 서로 조금씩 맞춰가면 각자가 스트레스받지 않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자만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역할을 넘어 더 이상 듣는 것조차 고통이 되기 시작하면 조금씩 마음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긴 세월을 뒤로하고 각자의 길을 택하는 선택이 어린 시절보다 조금은 더 빠르고 강단 있게 이뤄진다.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다. 관계는 시간의 누적보다 사고의 누적의 힘이 이제는 더 무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물론 연인이든 친구든 그 어떤 관계도 말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을 지킬 줄 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나를 깎아가면서 타인과의 관계를 지켜 낼 이유가 없다. 장황한 글 속에 내 취향이 녹아져 있다. 짧은 대화라도, 잠시뿐인 만남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관계가 있어 늘 힘을 얻는다. 취향을 갖는다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모두 선명해져 이어가는 것과 끊어가는 것이 분명해짐에 따라 더 관계가 소중해진다. 서른둘 겨울이 되니 비로소 나의 취향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다양한 이유를 행복의 기준으로 잡는 복잡한 당신 말고 작은 이유라도 의미 있게 바라볼 줄 아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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