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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Dec 08. 2023

29 매일 싸워도 매일 사랑할래




 대학시절 대외동아리로 알게 된 그녀는 나보다 한 살 위다. 스물둘에 만나 그녀는 스물셋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나는 서른둘, 그녀는 서른셋이 되어있었다. 벽화봉사 동아리로 낙후된 지역을 찾아다니며 벽화를 그려주는 활동의 동아리였다. 각기 다른 대학의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인 동아리 속에서 미대생인 나는 나이가 제일 어렸음에도 미술 팀장이 되어 페인트 조색과 벽화 전반적인 그림의 틀을 잡는 역할을 했다. 나보다 10cm나 키가 큰 그녀는 매번 내가 닿지 않는 벽을 담당해 주었고 한 살 차이임에도 나를 꽤나 귀여워(?)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학교였지만 자주 만나던 우리는 취업과 직장생활의 삶에 찌들며 만남의 횟수가 자연스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작년, 문득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SNS 내 좋아요를 눌러주는 애매한 사이가 아닌 서로의 삶에 대해 도란도란 말하던 10년 전 우리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언니 잘 지냈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 우리 만날래요?"

 "셈케이야!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마워! 우리 만나자!"


 지나온 세월이 무색할 만큼 약속은 쉽사리 성사되었고 드디어 처음 만난 지 10년이 되던 해 그녀를 다시 만났다. 세월은 흘렀지만 여전히 한 뼘 더 큰 그녀의 키와 웃을 때 눈이 사라지는 귀여운 외모는 그대로였다. 그녀도 만나자마자 '여전히 꼬맹이네'라며 익숙한 듯 나를 놀렸고 그날 우리는 오후 6시에 만나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시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의 남자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해주었다. 셈케이 너를 만나고 돌아온 날 쉴 새 없이 네 이야기만 하더라. 너와의 만남이 정말 즐거웠나 봐.


 저번주,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 누구도 겹치는 하객이 없어 홀로 한자리 차지하고 그녀의 가장 소중한 날을 축복해 줬던 그날. 형부와의 러브스토리를 다 들어서 그런지 그녀에게 축가를 불러주는 형부의 모습과 그 노래를 행복하게 듣던 그녀의 표정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연락하길 잘했다. 이 소중한 날을 축하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다양한 연애를 거쳐 행복한 결실을 맺은 그녀의 마지막 연애(?)의 종지부를 이토록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있어 마음이 벅차올랐다. '신부 너무 예쁘지 않냐'며 함께 호들갑 떨 친구는 없었지만 나는 혼자서도 요리조리 사진을 찍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도 담아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녀는 나를 찾아내 말했다.

 

 "셈케이야. 정말 고마워."



 10월의 어느 날 밤. 술 한잔을 따라주며 그녀는 내게 어떤 연애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 지금의 형부를 만나기 전 가슴 아픈 일들을 많이 겪은 그녀는 그 모든 과정을 뒤로하고 마침내 만난 형부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하고 난 후였다.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뚫려있던 그녀의 모든 공간을 채워주었다 했다. 그게 다른 의미로 그녀에겐 완벽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녀의 물음에 소주 한잔을 넘기며 고민했다.


 "매일 싸워도 매일 사랑하고 싶어요."

 "그게 무슨 의미야?"


 나는 늘 헤어짐 앞에서 냉소적이었다. 안 맞으니까 우린 더 가봤자 의미 없을 거라 생각해 왔다. 그래서 헤어짐 앞에 구질구질하게 '우리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무모한 생각이나 여지를 두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애교 많고 다정하던 내가 이별 앞에선 그 누구보다 냉정해지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던 당신들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그게 어쩌면 나의 연애철칙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보고 그럼에도 안되면 깔끔히 놓자. 일정 시간 동안 혼자의 삶을 보내며 그 철칙의 일부를 수정해야겠다 불현듯 생각했다. 관계에서 이별 할 이유는 예기치않은 순간 돌연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대단한 일이 아닌 사소한 일에서부터 말이다. 그런 상황을 최선의 과정 외에도 우리가 쌓아온 견고한 마음들을 귀중히 여겨 당시의 어려움을 사랑으로 이겨내 볼 수 있는 조금은 무모하지만 과감한 마음을 키우고 싶어 졌다.


 영화 <노트북>의 대사처럼 "매일 죽도록 싸우겠지만 사랑하니까 기꺼이 할래."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된다거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상대라면 기꺼이 잘라내야겠지만 그저 연인이라서, 다른 사람이라서 겪은 그 숱한 과정들을 '어? 안 맞네. 이거 몇 번 더 반복되면 진짜 헤어져야 하나?'가 아닌 '어? 힘드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니까 기꺼이 싸우며 사랑해 보자'라고 생각 할 줄 아는 여자가 되고 싶어 졌다. 어쩌면 순탄한 연애만 해온 나의 그저 해맑은 생각일지 몰라도 적어도 누군가를 만나 서로 사랑하고 세상에 오직 둘만의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는 그 과정의 숭고함과 위대함의 의미를 알기에 쉽사리 놓고 싶지 않다는 나의 굳은 의지일지도 모른다.


 <노트북> 속 노아가 '우린 역시 또 싸우네'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앨리를 붙잡고 앞서 말한 대사를 외칠 때. 싸워도 사랑하니까 기꺼이 하겠다는 노아의 표정에서 진짜 사랑이 보였다. 어쩌면 나의 개똥철칙이 아마 그때 수정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 사랑해도 힘들면 놓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붙잡고 있는 힘이 어쩌면 진짜 사랑이겠구나. 헉!



 나의 답변을 심오하게 듣던 그녀는 '셈케이 네가 쌈닭은 아니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라 말하며 끄덕여주었다. 내가 봐도 참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저 더 큰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장황하게 말한것뿐이다. 사실 나 또한 사랑에 대한 글을 써내리면서도 사랑이 무엇이지 내 삶에 사랑의 의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어렵고 여전히 난해하다. 철칙은 매번 생성과 소멸을 무한 반복한다. 정답이 없으니 말이다.

 그저 나를 많이 좋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냥 한번 시작해 볼까? 라 생각했던 생각도 최근에 깔끔히 지워졌다. 소개팅으로 만난 당신은 감사하게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사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을 좋게 본지는 몰라도 내가 말할 때마다 내내 쳐다보는 눈빛과 함께하는 미래를 자주 말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셈케이씨. 주말에 뭐해요?"

 "저 친구들하고 놀러 가기로 했어요!"

 "혹시 그 약속 취소하고 저랑 영화 안 볼래요?"

 "아 너무 오랜만에 보는거라 하하!"


 몇 번의 소개팅을 하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맙고 소중한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내 감정의 동요없이 좋아만 해주는 상대에겐 큰 매력을 못 느꼈다. 가볍게 시작조차 불가하다는 걸 깨달았다. 적극적인 당신의 진심을 정중히 거절하기로 마음먹은 날이기에 나는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당신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오늘 밥을 사주겠단 당신의 약속을 뒤로하고 결제를 했다. 구구절절 상처주지 않으려는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당신은 유쾌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마음을 이해해주었다.


 혼자의 시간이 꽤 길어지면서 나에 대해서 많이도 알아간다. 내가 참 좋은 사랑을 해왔구나.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에 대한 마음이 분명한 기적 같은 순간들을 감사히도 매번 맞이했었구나. 난 결국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어야 가장 나답게 최선을 다 할 수 있구나. 싸워도 미워도 그럼에도 사랑할 수 있으려면 내겐 그러한 시작이 필요했다. 그래서 되려 고마웠다. 혼자의 시간이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주어서 말이다.



 최근 소개팅 이야기를 그녀에게 풀어놓으니 무슨 감정인지 이해 간다며 또다시 빈 잔에 술을 채워줬다. 청첩장을 건네며 언젠가 셈케이 너에게 너의 청찹장을 받는 그날 마음이 벅차오를 것 같다 말해준 그녀. 왜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다.


 "어떤 연애를 하고 싶냐는 내 질문에 답하던 너의 표정에서 느껴졌어. 아마 넌 멋진 연애를 하고 너의 사람을 잘 알아봐서 결국 너의 삶에 그 사람을 데려올 것 같아. 그때 나도 진심을 다해 축하해 줄게."


 원래도 말을 참 예쁘게 하던 그녀였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그녀의 응원이 나를 더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믿어준다는 것은 마치 그렇게 될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조금 더 단단한 내가 되고 싶어 졌다. 실망감을 줬다는 이유 하나로 퉁명하게 당신의 전화를 받고 결국 당신마저 서운하게 만들었던 어리숙한 내가 아닌, 당신에게 실망하기 전 당신을 끌어안고 먼저 이해해 보려 노력하는 나의 사랑의 품을 키우고 싶다. 미워죽겠다가도 당신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떠올려 먼저 손잡아 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내일은 깨지 않은 약속, 친구들과 당일치기로 대부도를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분주히 유부초밥을 싸기 위해 이것저것 사놓았는데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가는동안 차 안에서 어떤 대화를 나눌까. 18년 지기 셋이서 아마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다 알면서 또 들어도 재밌는. 그런데 내일은 서로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려 한다. 그리고 나도 말해주고 싶다.


 나는 기꺼이 미움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따스한 사랑을 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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