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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Nov 23. 2023

28 좋은 어른이 읽어준 사랑




 지쳐서, 그래서 조금 쉬다가 이직을 했었다. 잘 해낼 줄 알았는데 어느새 우울함이 나를 가득 채웠던 스물일곱 봄,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만난 그녀는 나의 사수였다. 그녀는 나의 8년 직장생활에서 만난 가장 감사한 선배이자 어른이었다. 그리고 꼭 그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했었다. 최종면접 날 중요한 외부미팅으로 참석하지 못한 그녀는 면접관들에게 꼭 나를 뽑아두라 신신당부를 했다고 했다. 나에 대한 정보는 포트폴리오와 엉성한 자소서 한 장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나를 간택(?)해준 그녀에게 감사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녀는 제품을 제작하고 생산하는 BM이었고 나는 그녀의 기획에 맞추어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로 긴밀한 관계였다. 그녀는 내가 제안하는 많은 디자인들을 좋아라 해주었고 회의적인 디자이너에서 다시금 열정을 장착하게 된 그 시절, 나에게 자신감과 애정을 잔뜩 준 그녀가 갑자기 생각이 나 글을 써 본다.

 그녀는 슬하에 두 명의 자녀가 있었고 나를 만난 해에 이혼을 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나에게 연애 관련된 이야기를 참 많이도 해주었다. 연장자의 경험담 듣는걸 좋아하는터라 미팅을 가장한 티타임 시간에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나에게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다. 그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와의 갈등이 있을 때 어김없이 그녀를 찾아 하소연을 했고 그녀는 어떤 이야기를 듣던 늘 이런 질문을 가장 먼저 물었다.


 “셈케이 너는 어떤데?”


 나는 내 감정보다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는데 그녀는 매번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물음에 답을 하면서 깨달아갔다. 내가 서운했구나. 내가 이번엔 심했구나. 그녀는 내게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의 감정을 가장 잘 들여다봐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흥분한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주었고 분명 회사를 다니는데 묘하게 마음을 치유받는 느낌도 들었다. 이십 대 과도기에 만난 그녀는 시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쓰자면 끝도 없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의 퇴사날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팀장이 유독 그녀를 힘들게 했고 무리한 요구를 제안하던 날 그녀는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결심한 듯 빨간 볼드체가 가득한 메일을 팀장과 팀원들에게 전송했다.


 - 섬케이씨는 사회경력이 우리보다 짧을 뿐 결코 함부로 대하고 허드렛일을 시켜도 되는 직원이 아닙니다. 복합기에 뽑은 출력물은 스스로 가져가세요. 귀한 직원입니다.

 - 회의실 예약은 필요하신 분이 직접 예약하세요. 혹시 예약 방법을 모르시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 좋은 결과는 함께 만들어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 누구의 일방적인 강요가 아닌 다수의 의견과 소통 그리고 통합으로 형성됩니다. 부디 팀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주세요.


 메일 전문을 이곳에 올리고 싶지만 조심스럽기에 딱 세 문장을 옮겨봤다. 첫 번째 문단이 바로 나에 대한 글이었다. 메일을 읽자마자 내 눈을 의심했다. '나? 내 이야기잖아?' 팀 내 과장 한분이 종종 바쁜 날 나를 찾았다. “셈케이 주임, 복합기에 뭐 하나 보냈는데 좀 가져다줄래요?'” 나는 시키는 대로 출력물을 가져다주었고 그 반복을 마주한 그녀는 내심 못마땅했었나 보다. 직장 생활을 하며 이 정도 상사의 부탁은 충분히 해낼 수 있지만 그러한 일들이 당연히 아랫사람의 역할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진 않지만 상황 상 부탁하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그 과장은 전자였다. 그녀는 퇴사했지만 그 이후 나에게 출력물을 가져다 달라 부탁하는 이는 사라졌다. 한 명의 어른의 일침은 꽤 큰 힘을 발휘했다. 그날 생각했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그렇게 그녀가 떠난 자리가 오래 공허했지만 그녀가 가르쳐준 많은 것들 덕에 4년 정도 경력을 쌓고 퇴사를 했다. 그녀의 퇴사 후 논현의 어느 횟집에서 한 잔 하던 날, 그녀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경제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사랑이란 감정마저 사치라고 느껴졌다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경제적 역할을 함께 잘해나가야 비로소 사랑도 가정도 자녀도 그리고 마음도 지킬 수 있다고 다소 내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이야기에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이 남자 저 남자 많이 만나라는 말이 흥청망청 감정을 낭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떨 때 행복과 분노를 느끼는지, 그래서 결국에 어떤 형태의 사랑을 하고 싶은지 몸소 느끼며 깨달으라는 뜻이라며 나에게 본인을 투영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다소 깜찍한 내 말에 그녀는 소주 한잔을 말끔히 넘긴 후 나를 지긋히 바라보았다.


 "진짜 어릴 때 나 보는 거 같아서 귀엽네."


 그럴 만도 한 게 그녀와 나는 13살 차이가 났다. 내가 이십 대 후반을 달릴 때 그녀는 사십 대 초입에 도착했다. 그녀 눈엔 그저 귀여운 존재였을지도.(아닌가) 그녀에게 그럴싸한 답을 기대했지만 그녀 또한 사랑이 뭔지 여전히 모른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랑이던 마음이 내내 평온한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쯤 알게 되었다고 덧 붙였다. 당시 그녀가 해준 숱한 이야기들이 그저 훈화말씀처럼 느껴졌는데 묘하게 시간이 흐른 지금이 돼서야 종종 그녀의 말들이 떠오르곤 한다. 그 이후로도 몇 번 만남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바쁜 일들이 겹쳐지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다. 나의 혼돈의 시기에 단단한 심지를 심어준 그녀가 여전히 고맙게 자리한다.



 내가 해온 사랑들만이 나의 사랑을 형용해 준다 여겼는데 돌이켜보면 스쳐간 인연들이 훅훅 던져준 사랑의 의미들이 어느 순간 나의 사랑에 속살이 되어주기도 했다. 누군가는 다른 이의 연애스토리나 조언 아닌 조언을 피로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업체 사장님과의 미팅 중  해주시는 젊은 시절 이야기조차 늘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나도 뭣도 아닌 나름의 내 사랑을 브런치에 두서없이 글을 쓴지도 꽤 되었다. 이별도 새로운 시작도 혼자의 시간 속에 키워나간 사랑의 의미들도 모두 나 자체였다. 이렇게 사랑이란 의미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갈 때가 되니 나도 모르게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건네주고 있었다.


 "네 마음이 평온하다면, 그건 사랑이야."


 의도치 않게 나도 누군가에게 그녀 같은 존재로 잠시나마 남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일 무서운 추위가 찾아온다던데 멀리서나마 그녀의 평온을 바라본다. 지금의 그녀는 봄같은 겨울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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