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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오만가지 사람마음 18


''착한 아이' 칭찬이 감정억압으로 작용할 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는 어른들이 다 아는 TV만화영화 '캔디'의 주제곡이다. 이런 만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착하기 때문에 고생이 끝이 없는 인물로 나온다. 보통 드라마에서는 그 착한 주인공이 마지막에는 행복하게 잘사는 모습으로 끝나곤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착하다는 말을 항상 듣고 자란 사람의 삶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목격하게 된다. 착해야 한다는 '부담감', 착하다는 말의 '억압'이 자칫 잘못된 경우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망가뜨리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담실을 찾은 최 양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감정을 느끼면 분노에 휩싸이거나 앞뒤 상황을 착각하기 일쑤여서 아예 감정을 숨기며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무기력과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런 증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바깥일로 바쁜 부모가 집을 비우면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부모의 빈자리를 늘 자신이 메워야 했고, 잘 챙기지 못할 때는 부모의 야단이 돌아왔다. 또한 동생이 욕심을 부려도 자신이 참아야 했다. 부모는 ‘넌 착하니까 네가 참아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 착하다는 말을 들을수록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곤 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그녀에게 "너 착하구나"라고 수시로 말했다. 착하니까 이것은 네가 해, 넌 착하니까 네가 양보해, 착한 니가 이해해야지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다. 결국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도, 감정을 느끼고 드러내고자 해도 표현이 안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화내고 욕심을 내면 나쁜 사람이라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니 어떤 감정을 갖는 것조차도 '죄책감'이란 억압적 기제에 눌리게 됐다.

이런 과정이 오래 진행되면 분노와 죄책감은 자동적으로 연동된다. 정당한 분노나 욕구가 올라오면 곧바로 죄책감에 빠지고, 스스로 감정 표현을 억압시킨다. 이후 그녀는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슬퍼서 우는 것같은데, 슬프다는 감정을 모르고 자신의 눈물이 왜 흐르는지 모른다. 슬픈 감정은 없고, 눈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오기도 한다고 했다.

인간은 적당히 타락하고 적당히 도덕적인 존재다. 니체가 그랬던가, '인간이란 천사와 악마 그 중간 어디쯤'이라고. 아무리 악해도 악마는 아니고 아무리 착해도 천사는 아니다. 그 균형을 잡아가며 사는 게 정상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초자아가 도덕을 지향한다면 이드는 욕망을 지향한다고 보았다. 그 중간의 자아는, 내면의 갈등과 외부의 상황 속에서 균형을 찾아간다고 보았다.

영화 '조커'의 스틸컷

"아들 너 밖에 없다"는 엄마의 하소연도

상담실을 찾은 한 대학원생의 사례도 이와 비슷하다. 그도 감정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는 노동일을 하고 엄마는 친구가 하는 교회에 열심이다. 아버지는 교회를 가지 말라고 가끔씩 집에서 소리소리 지른다. 그렇게 힘든 날이면 엄마는 아들인 이 대학원생에게 하소연을 한다. 아버지 이야기며, 자신의 이야기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너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교회를 가면 목사님은 그에게 청년부 일이며, 예배시간의 음악반주 등 이런저런 일을 다 그에게 시킨다. 그 밖의 교회 일도 다 시킨다. "교회에 일꾼은 너 밖에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청년들 사이에 안좋은 일이 일어나면 목사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혼냈다고 한다. 자신에게 야단을 치면 문제가 있는 청년들은 알아서 조용해졌다. 목사님이 자신을 꼭집어 혼내는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다른 청년을 혼내면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봐 그를 혼내면서 다른 청년들을 훈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다. 정말 본인이 착하고 신앙이 좋은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삶이 붕 뜬 느낌에 마치 진공관 속에서 생활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호소했다. 필자는 그가 감정의 억압이나 부조화로 인한 무기력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봤다. 그래서 그에게 상담이라기보다 삶의 코칭 같은 조언을 해줬다. '무조건 안 해 본 것을 해보라', '신앙적으로 말해 다양한 죄를 저질러보라'는 식의 조언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반복적인 죄를 저지르고 곧잘 회개하는 것처럼,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설사 죄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해보라고 말해주었다.

그는 얼마동안 다양한 일을 시도하는 듯 보였다. 그에게 또 스스로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려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의 감정, 목사님의 감정을 다 받아주는 쓰레기통 역할을 하면 할수록 본인의 삶이 망가진다는 조언을 덧붙여주었다. 앞으로는 엄마를 똑바로 보고 "아빠에게 화나면 아빠에게 말해!"라고 반박하게 유도했다. 또 교회일도 하지 않겠다고 목사님에게 말하라고 했다. 다행히도 그는 필자의 말을 잘 따르고 좋은 방향으로 갔다.

착하던 사람이 이처럼 자기주장을 똑바르게 밝히고 주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면 평소에 같이 있던 주변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 착한 가족 한 사람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챙기고 편하게 해주었는데, 그 사람이 변하니 가족 전체까지 힘들어진다는 식이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순종만 하고 남편의 감정을 다 받아주던 아내가 주체성을 갖기 시작하면, 남편은 어디서 상담이란 걸 받고 말대꾸를 또박또박 하고 시키는 일도 안한다며 "상담 선생이 나쁜 놈"이라고 화를 낸다. 그렇게 찾아오는 남편에게는 "선생님의 딸이 결혼해서 사위에게 아무 말 못하고 주눅들어 사는 걸 원하십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설득한다.  

이유있는 악역,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TV드라마에는 착한 주인공도 나오고 악역도 나온다. 요즘은 악역을 ‘빌런’이라고도 하는데, 그가 역할을 잘해야 드라마가 뜬다고 한다. 빌런은 전통적 악역과 차이가 있다. 예전 드라마에서 악당은 그냥 무자비하게 악한 짓만 골라서 했는데, 요즘 드라마에서 빌런이라는 악당은 나름대로 서사가 있고 악한 역할을 하는데 이유도 있다. 이런 역할들은 드라마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들로 구분되어 나오지만, 현실에서는 한 인간 내면속의 다양한 모습이다. 이를 '페르소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심리학자 융은 "적절하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가면을 쓰는 게 인간이고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도록 역할이 구분되어야 건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적당히 맞추는 것도 필요한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무조건 착하거나 무조건 악한 것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다양한 상황과 사람을 대하면서 적절하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사회와 관계맺고 살아가는 건강한 인격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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