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회전체가 '치유 공동체' 되어야 한다

마음의 응어리·원망 다 토해내게 해야

트라우마에 빠진 한국 사회

이태원 참사로 젊은이들이 많이 죽었다. 죽은 사람들이 대부분 청년들이라 그들의 죽음을 맞이한 부모와 가족들의 고통을 보게 된다. 참사와 관련되지 않아도 온 국민이 그 모습을 보며 함께 괴로워한다.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저런 젊은 시절이 있었고 나의 자식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어진다. 뉴스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이미지에서 참사가 내 머리에 각인된다. 우리 모두 트라우마에 빠져드는 상황이다. 

트라우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부는 트라우마 완화를 위한 심리상담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정부 돈을 투입하겠다는 뜻이다. 기다렸다는 듯 심리상담 분야의 종사자들 일제히 트라우마의 전문가가 된다. 세월호 때처럼 말이다.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도 모두 유가족을 돕기 위해 나섰다. 정부와 의료종사자가 나섰고 심리상담가들도 유가족을 도왔다. 그런 결과 잘 치유됐는가. 


요란한 '유족 위로하기'가 끝나고 나면, 유족에게 진짜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것이다. 초기에는 자녀의 죽음이 괴로워서 몸부림쳤지만, 이제 유족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괴롭다. 이 때 몇 몇은 극단적인 선택을 택하기도 한다. 우리의 도움의 시작은 이 지점이 돼야 한다. 밖으로 향하던 분노가 자신으로 향할 때,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쉽게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특히 트라우마는 하나의 단어나 현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인간,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156명의 죽음 뒤에는 156명의 사연이 있다. 또한 그들의 장례식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국민 수만큼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트라우마란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순 없다. 하나의 사건이 트라우마로 진행되는 과정은 심리학적·생물학적 설명으로 가능하지만 인문학적 설명도 필요하다. 지금 시점에서는 공동체가 아픔을 겪으며 반성하고 성숙해지지 않으면 모두의 고통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번처럼 큰 사건을 경험한 개인은 자신이 과거 경험했던 감정적 사건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킨다. 이태원이든 세월호든 청년, 청소년의 죽음은 내 자신의 청년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초기에는 듣고 보는 분명한 사실을 통해 슬픔이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숨겨둔 슬픔이 고개를 치켜든다. 무의식적 고통은 말로 설명되지 않은 채 몸이 아프거나 두통 증세를 동반한다. 이 과정에서 도움의 손길이 없다. 고통받는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 사회 전체가 '치유 공동체'가 되기 전까지 말이다.


미국에서 상담 교수를 하러 간 친구가 경험한 일이다. 학교에서 사고로 많은 학생이 죽자, 학교는 지역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상담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그는 상담치료를 하러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장소에는 할머니에서부터 지역 어른과 지도자 등이 많이 나와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의 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어깨를 토닥이며 함께 있어주기만 했다. 상담을 해주러 갔던 자신이 머쓱해졌다고 했다.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일은 전문가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더 크게 보면 공동체가 해야 하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하는 자세가 공동체의 모습이어야 한다. 어설픈 말과 위로는 또 다른 비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에 대해서 조정권이란 시인의 '백지'라는 시가 있다.


방황하는 이 옆에서는 아무 질문도 하지 말 것.
침묵으로써,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출 것.
그 옆에서는 다만 공손함으로써 그 영혼에 합당한 예절을 갖출 것.


요란스러운 화장기를 벗길수록 인간의 영혼이란
고통苦痛,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
살아온 날들과 또 살아야 할 수많은 날들의 두려움에 대하여
지상至上의 위안이란 마치 간섭과도 같은 것.
그것은 또한 내가 내 스스로에 행하는 강요와도 같은 것.


때때로 침묵함으로써, 이 시간에 나는 마음과 영혼과 빈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느끼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뼈를 찔리는 일이 아닌가.
뼛속 깊이 찔리는 그 실감나는 시간의 축적蓄績인 영혼
흔히 바쁘게 지나치다가도 유정有情한 눈길을 주다 보면
백지白紙는 비어 있음으로써 충일充溢한 불을 켜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을 찾아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이번 참사의 철저한 원인 규명을 촉구했다. 사진=연합뉴스


행동보단 유족 얘기 들어주는 침묵으로


필자는 백지를 침묵이라 읽고 싶다. 방황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행위는 말이 아니라 침묵일 수 있다. 이는 전문가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배워야 할 일이다. 5.18 광주 민화 운동이후, 대구 지하철 사고 이후 트라우마 환자가 아직도 남아있다. 더 깊이 올라가면 정신대 할머니에서부터 월남전 병사들의 트라우마도 다 치유됐다고 볼 수 없다. 이처럼 트라우마는 깊고 오래 간다.


이태원 참사에서 건강했던 아들을 병원에서 시신으로 접한 어머니는 연신 인공호흡을 했다. 또 다른 아버지는 가슴을 내리치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트라우마는 비합리적 행동을 하게 만든다. 눈에는 헛것이 보이고 몸은 불바다에 있는 듯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돈 지원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정부의 태도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이 말로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영정 사진을 끌어 앉고 광장에서 뒹굴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부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도록 해줘야 한다. 슬픔을 검은 망토에 감추며 숨기는 서양의 풍습보다 곡하는 사람을 불러서 함께 울었던 한국의 풍습이 정신건강에 더 좋다. 표현하지 못한 슬픔은 병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를 원망하고 곡하게 해줘야 한다


정부는 장례식장에 희생자의 사진도 올리지 못하게 하고, 책임도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란다. 그래선 안된다.


집단 트라우마의 시작은 원망이다. 원망을 하지 못하면 병이 되거나 자신에게 원망이 향하게 된다. 원망하게 하고 소리치게 해줘야 한다. 일차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광장을 내주고 영정 사진을 걸고 국민이 울게 해야 한다. '애도기간'이란 소리치고 원망하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갖는 것이다. 유가족을 울부짖게 만들어 주고, 국민은 침묵으로 지켜봐줘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원망과 한(恨)을 국화 한송이가 대처했다. 다분히 서양 방식이다. 그렇게 유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의 한은 풀리지 않는다. 트라우마를 숨기도록 강요하는 모습이다. 원래 한이 많은 민족인데 조용히 있으라는 강요는 트라우마를 계속 가지고 살라는 말이다. 그냥 소리치고 울어야 한다. 하늘을 향해 욕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들에게 그 한이 풀리도록 해줘야 한다. 그 다음에 이성적 대처를 할 수 있다.




작가의 이전글 가족내 '침묵이라는 폭력'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